역사이야기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 정리

cky0214 2024. 3. 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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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보다 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해동성국 발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었던 발해는 926년 1월 14일 멸망합니다.

 

대조영에 의해 698년에 건국된 이래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발해는 227년의 짧은(?)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지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발해는 거란족,요나라에게 멸망당하는데요. 

 

발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검증된 것은 없습니다. 유력한 원인만이 있을 뿐이지요.

 

이번 post에서는 발해 멸망 원인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거란족에 대한 post도 같이 재미있게 봐주세요.

 

 

역사속으로 사라진 북방민족, 한 때 북방의 패자 거란족 역사

10세기 초 북방의 대 제국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그들의 위세는 서쪽으로는 몽골초원, 동쪽으로는 연해주 끝, 남쪽으로는 송나라 북부 연운 16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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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 원인


1. 지도층의 내분설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는 멸망 이전부터 왕실과 귀족 내부에서의 다툼이 많았습니다.

 

거란의 침입 이전부터 고위층의 망명 행렬이 이어졌음이 여러 사서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사회적 혼란의 증거이므로, 이것이 발해의 힘이 약해져 쉽게 멸망의 길로 갔다는 설이지요.

 

 

고려서 926년 1월 3일에 적힌 내용을 보면, 거란에 의해 수도 상경성의 길목에 자리잡힌 부여부가 함락되기 5일 전인 925년 12월 29일에 발해의 좌수의 소장인 모두간과 검교개국남 박어등이 백성 1천호를 데리고 귀부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발해 내분설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런 상당한 규모의 발해 유민들과 고위 관료들이 넘어온 사실은 멸망 이전부터 지배층의 분열이 심했던 것이 아니냐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지배층 사이의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거나 방비가 가장 튼튼할 수도의 방비마저 상당 부분 저하된 와중에 급습을 당해 지나치게 빨리 무너졌다는 것이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의 지도층이 내분을 겪으면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고, 이는 국가 방비의 부실로 이어져 적에게 좋은 먹잇감이 욉니다.


2. 말갈족과의 갈등

발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그 중 흑수말갈족은 발해 선왕시기에 복속된 부족인데, 발해 말기 흑수말갈을 비롯한 여러 말갈족의 이탈이 신라와 고려 역사서에 나타납니다.

 

886년(발해 대현석 15년, 신라 헌강왕 12년), 한 말갈 부락인 "적국인"이 강원도 삼척지역에 건너가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해 소통하고자 한다라는 목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말갈족

 

신라와 인접한 말갈부락들이 신라와 발해사이에 간을 보고 있었다는 기록이지요.

 

대선인 말기에는 이탈한 말갈족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921년 달고 171명이 고려 국경을 넘어와 신라도를 통해 약탈을 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흑수말갈은 921년 봄에 고지라, 921년 여름에 아어한이라는 흑수말갈 추장들이 자신들의 측근을 데리고 고려고 귀순하기도 했지요. 

 

923년에는 골암진(강원도 안변)에 북번(북방 야만인)이 자꾸 침입해와 유금필을 보내 복속시킨 역사도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13대 대현석 시기부터 말대 대인선 시기까지 흑수말갈 상당수가 발해로부터 이탈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3. 백두산 분화?

이 학설은 과거 일본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입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에 KBS에서 다큐를 통해 방영하면서 유명해진 학설이지요.

 

발해의 멸망의 원인을 이해하기 쉬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학설입니다. 멸망 시기와 백두산 대폭발 시기가 맞물려 받아들여지기 쉬운 내용이었지요.

 

실제 발해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 백두산 대폭발이 비공식 최대 화산 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백두산 폭발

 

당시 화산재는 한반도를 1m 두께로 덮을 만큼의 양이었다고 하지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이 땅을 폐현 시킨 것도, 파괴 정도가 심해 땅을 버린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설에는 처음부터 반론도 적지 않았지요.

 

 

가장 큰 반론은 거란, 고려, 신라등 3국 어디에서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정도의 큰 사건이라면 어디 역사서에서라도 적힐 만큼 큰 사건이기 때문이지요.

 

이후 연구를 통해 백두산의 화산제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재와의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말은 926년 11월, 백두산 분화는 969년을 기점으로 앞뒤 20년 쯤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가설은 힘을 잃게 됩니다.

 

2017년 좀 더 정확한 연구가 공개되었는데, 해당 연구에서 공개한 추정 연대는 946년 후반기로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발해 멸망 20년 뒤에 화산 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실해졌지요. 

 

게다가 이 연구는 기존 사서들과 비교해서 교차검증도 이루어졌습니다.

 

백두산 폭발

 

946년 고려사를 보면 946년에 개성에서 천고명이 들렸다라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지요.

 

일본 나라현에 있는 고후쿠지 사찰에도 946년 11월 하늘에서 하얀재가 내렸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4. 거란의 급습설

백두산 분화설이 폐기된 이후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 가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인데요.

 

거란이 발해의 제 1 방어선인 요동 전선을 우회하여, 상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그곳을 무너뜨립니다.

 

이후 발해의 정규군이 정비하기 전에 수도 상경성으로 직도하여 속전 속결로 수도를 무너뜨리고 국왕 대안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없이 멸망당했다는 내용이지요. 

 

거란의 발해공격

 

이는 그냥 발해의 직접적인 멸망 원인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의 주된 전략은, 시간이 오래걸리는 공성전보다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한 직도 전략으로 전쟁을 수행합니다.

 

발해가 개전 10일만에 수도를 포위당하고 포위한지 11일만에 함락당한 것은 불가사의해 보일 수 있지만, 북방 유목민족들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고려가 거란과의 2차 전쟁에서 개경을 함락당한 점, 3차전쟁에서 소배압이 개경을 목표로 우회한 점(결국 포위당해 전멸), 병자호란 당시 8일만에 한양을 점령당한 점을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지요.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또 있습니다.

 

이러한 속도전은 중앙정부만 무너뜨릴 뿐 대다수 야전군이나 지방 세력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인데요.

 

요사를 살펴보면 대인선이 사로잡힌 후, 남은 발해군과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발해가 멸망한 것은 7개월이 지난 926년 8월입니다.

 

이후로도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 가까이 발해부흥운동을 펼치며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저항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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