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200년동안 이어진 발해부흥운동의 역사

cky0214 2024. 3. 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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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은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 내 사료도 부족한 상황이라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지요. 

 

그래서인지 인지도도 낮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혹은 역사 교육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발해부흥운동

 

우리민족이 마지막으로 만주에 세웠던 나라 발해, 이 발해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길 바라며 이 post를 작성합니다.

 

이번 post에서는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알아봅니다.

 

발해 멸망에 대한 post도 같이 재미있게 봐주세요.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 정리

고구려보다 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해동성국 발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었던 발해는 926년 1월 14일 멸망합니다. 대조영에 의해 698년에 건국된 이래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발해는 227년의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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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


1. 후발해(後渤海,926년~?)

후발해는 성립과 멸망이 역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주변국 역사서의 외교 관련 문헌들에서 발견되는 나라입니다.

 

후발해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 929년 5월 발해사신 고정사가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는가 하면, 송나라 시절 오사성발해왕이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면서 후발해의 존재가 확인 됩니다.

 

중국 5대와 송나라와 외교활동을 벌였던 압록강 근처의 발해를 후발해 혹은 오사성발해라고 부릅니다. 부흥운동의 첫번째 나라이지요.

 

발해멸망 직후, 함락되지 않았던 압록강 근처의 군사들이 옛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했으며, 975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온 발해출신 장수 연파와 함께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979년 정안국의 일부세력을 규합하기도 합니다.

 

 

고려사에도 이들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934년 대진림, 938년 박승과 같은 사람들은 후발해인들인것으로 보입니다. 

 

후발해의 존속기간과 관련해선 수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요.

 

일본 학자 키요시는 후발해의 중심을 압록강으로 보고 있고, 정안국 건국 시점인 938년까지 10년동안 지속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의 다른 학자 히노 카이사부로는 후발해가 정안국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주장합니다.

 

후발해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대광현(마지막왕 태자)과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한 대인선(마지막왕)의 동생, 대광현의 숙부가 대립하고 있었고 두 세력간에 갈등이 존재, 결국 대광현이 패배하여 934년 고려로 망명했으며, 올야 정권(올야성 발해유민)이 후발해를 차지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옛 발해 남경남해부의 열씨 정권이 대광현의 공백을 틈타 압록강에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후발해를 차지한 올야정권이 거란의 공격으로 붕괴된 시점인 1007년을 멸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후발해 멸망과 관련된 여러 연구가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드러난 점은 없는 아직까지는 수수께끼의 나라입니다.

 


2. 정안국(定安國,938년~986년)

정안국은 발해의 귀족인 열만화(烈萬華)가 938년 후발해의 일부 세력을 이끌고 옛 서경압록부가 있었던 압록강유역에 정안국을 건국합니다. 

 

열만화와 오현명 2대에 걸쳐 48년간 지속되다가 986년 고려를 침공하려 했던 거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입니다.

 

정안국

 

946년 백두산이 폭발하여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970년 열만화가 북송태조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며, 열만화를 도와 정안국을 건국한 오제현의 후손인 오현명이 976년 제2대왕으로 등극, 원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합니다.

 

981년 오현명이 북송 태종에 사신을 보내 요를 협공하여 반씩 가지는 것을 제안하지만, 북송은 서하를 견제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오히려 요나라에 밀리는 형국이라 거부합니다. 

 

오히려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공격을 받아 986년 멸망하고 맙니다. 

 

 

거란은 983년 1차로 침공하였고, 2차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985년 다시 침공하였는데 이 때 패망에 이르게 되지요.

 

거란은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포로 10만명과 말 20여만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땅에 4개 주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합니다. 

 

이로써 2대 48년간 지속되었던 정안국은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1116년 거란의 멸망때까지 지속됩니다.


3. 연파국( 燕頗國, 975년~995년)

연파국은 정식 국명은 아니고 연파라는 옛 발해 장수가 975년 부여부에서 항거를 일으킨 세력입니다. 

 

부여부

 

이곳에서 세력을 키워 반란을 벌이다가 995년 올야에 도망친 뒤 올야국과 함께 거란에게 저항했다고 합니다.

 

오사성발해왕(후발해) 염부와 동일인으로 추정되며, 올야국과 달리 995년 이후 기록이 없어 그 세력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4. 올야국( 兀惹國, 또는 오사국 烏舍國,995년~?)

오사국은 발해 멸망이후, 발해 유민 오소도(烏昭度)가 요의 지배에 저항하여 오사성에서 건국한 나라입니다. 올야국이라고도 하지요.

 

995년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996년에 결국 거란 요나라에 항복하여 명맥을 유지합니다.

 

오사국

 

이후 생여진의 완안부가 세력을 키워 1114년에 빈주를 함락시키자 올야의 추골실은 철려의 왕 회리보와 함께 항복함으로써 오사국은 금으로 합병되지요.

 

928년 동단국(거란 괴뢰국)이 요양으로 천도되면서 발해인들 대부분은 거란으로 강제 이주당하거나 이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지만 유민들도 상당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갈족과 함께 부흥 국가를 술힙하여 거란에 저항하는데, 연파의 세력 중 일부와 함께 오사성을 중심으로 건국을 하게 되지요.

 

이 나라의 왕을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 또는 발해 염부왕, 발해왕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건국자 오소도, 오소경은 발해 귀족 성씨의 하나였지요.


5. 흥료국(興遼國,1029년~1030년)

발해 고왕 대조영의 후손인 대연림이 1029년 요나라 동경요양부지역에서 세워 거란에 정면으로 맞선 나라입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반란 1년만에 요나라에게 진압당해 멸망했지요.

 

건국 과정을 살펴보면, 

 

요의 잦은 대외원정과 재정문제로 요야지역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발해인과 거란인들과의 갈등이 커집니다.

 

흥료국

 

마침 이 지역에 기근이 일어나 요나라를 향한 발해유민들의 원망은 커져갑니다.

 

이 때 대조영의 7대손 대연림이 소파득 등 호부 관원들을 죽이고 이 지역의 백성들이 대연림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1029년 8월 3일, 연호를 천경이라하고 흥료국을 세우자 많은 백성들이 따랐고, 북의 여진도 그를 따릅니다.

 

흥료라 함은 요동, 요하에서 난을 일으키다라는 뜻입니다. 

 

1029년 10월 , 요 성종 야율융서는 남경유수 연왕 소효목을 도통으로 삼고 소필저글 부통으로 요양성을 포위합니다. 

 

1029년 12월 태사 대연정은 도통 소효목의 공격을 맞서기 위해 동, 북여진을 모아 항쟁하는 한편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구원요청했으나 고려는 거부합니다.

 

 

1030년 1월, 다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거부당하고, 3월 요나라는 긴 울타리를 쌓아 성을 감시합니다. 5개월을 버티며 7월에 또 고려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지만 고려는 다시 무시합니다. 

 

결국 8월 흥료국의 장군 양상세가 요군과 내통하여 동경성의 대문을 열게되고 결국 대연림의 체포와 함께 대요투쟁은 1년만에 막을 내립니다. 

 

이 일을 계기로 요나라도 동부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요나라 조정에서도 발해 유민들에 대해 특혜를 제공하는 유화정책이 실시됩니다. 


6. 고욕국(1115년2월~7월)

고욕국은 정식 국호가 아니라 건국자인 고욕의 이름에서 따온 국명입니다.

 

1115년 요나라의 내몽골에 위치한 요주에서 고욕이 발해 유민들과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왕을 칭합니다.

 

1115년 4월 소사불류가 이끄는 요나라 토벌군을 물리쳤으며, 같은해 5월에는 남면부부서 소도소알 또한 물리칩니다.

 

그러나 6월 소도소알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결국 패배하여 사로잡히고 수천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5개월만에 실패한 나라였지요.


7. 대발해(大渤海, 1116년 1월~5월)

대발해는 발해멸망 200년 후인 1116년 발해유민 고영창이 세운 나라입니다.

 

국명은 발해이지만 나라 구분을 위해 대발해라 불리우는 나라이지요. 또는 대원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116년 1월에 건국되어 5개월간 이어진 나라입니다.

 

대발해

 

고영창은 1116년 1월 1일 군사를 이끌고 거란족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보선을 죽인 다음 요양성에서 대발해를 건국합니다. 

 

건국 10일만에 요나라 동경 관할하에 있던 요동의 79주 중 50주를 지배하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1116년 5월 요의 장수 장림이 대발해를 공경하자 대발해는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오히려 금의 장수인 알로가 고영창을 사로잡아 대발해를 멸망시킵니다. 

 

흥료국에 비해 국가체제도 갖추지 못했고, 고려에게도 오히려 자신에게 표문을 올리라고 하는 등 한계가 있던 정권입니다.

 

또한 발해 멸망 200년이 지난 시점이라 정체성도 희미해진 것도 문제였지요. 


8. 동란국(東丹國,926년~936년) - 거란 괴뢰국

동란이란 말은 동쪽에 있는 거란의 국가라는 뜻으로 발해부흥운동 나라가 아닌 거란의 괴뢰국입니다. 

 

그러나 거의 독립국 수준으로, 감로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고 있었고 외국과도 교류를 하였다고 합니다. 

 

옛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태자 야율돌욕을 인황왕으로 봉해 명목상으로 통치하기 위한 국가였지요.

 

동란국

 

발해유민 190만명이 살았다고도 하며 동란국 외교 사절이 거란을 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관리들은 발해인이었기 때문이지요.

 

또다른 이름으로 동단국이라고도 불리웁니다. 밀림이 많아 숲의 바다라 불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도는 옛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홀한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개칭한 천복성이었으며, 928년 요동의 남경(고구려 요동성)으로 천도합니다.

 

야율돌욕의 동생 야율요골과 황위를 놓고 싸우다가 야율요골이 결국 황제가 되제 야율돌욕은 후당으로 망명하고, 야율돌욕의 아들 야율올욕이 동란국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러나 936년 결국 허울뿐인 이름도 없애고 거란 본국에 합병됩니다. 일부 영토는 정안국에 흡수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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