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중 전무후무(前無後無)란 용어가 있습니다.
간단히 풀이하면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독보적인 유일함을 뜻하지요.
뛰어난 사람에게 붙히는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이 사자성어의 유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제갈량에 대한 일화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post는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중국 서진 시대 팔왕의 난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전무후무의 유래
1. 전무후무의 뜻
전무후무의 한자는 前無後無 입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는 다음과 같지요.
중국어 : 空前绝后(kōngqiánjuéhòu) / 前所未有(qiánsuǒwèiyǒu)
일본어 : 空前絶後(くうぜんぜつ)
한자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라는 말이며 독보적인 유일함을 뜻합니다.
위 중국어, 일본어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국 이외에서는 "공전절후"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입니다.
2. 유래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사자성어는 삼국지 촉나라의 제갈량 공명을 칭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며, 중국에서는 전무고인, 후무래자(前無古人,後無來者)라는 풀 버전을 더 많이 쓴다고 하네요.
이는 청나라 때 소설가인 이여진의 "경화록"이라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제갈 공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며 유래한 성어이지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고 개국 공신으로서 성의백에 봉해진 유기(劉基)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던 중 옛 촉한의 땅이었던 촉땅에 들어섭니다.
이 유기는 원래 제갈공명을 평소 과소평가하던 인물입니다. 제갈량은 촉땅에서 천하를 삼분하는데 그쳤으니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믿었지요.
역사의 고적과 풍물들을 두루 구경하면서 날이 저물어 어떤 절에서 하룻밤을 쉬게 됩니다.
새벽 첫닭이 올 무렵이 되어 잠이 깼는데 어디선가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절이 민가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텐데 궁금해진 유기는 주지스님에게 이유를 묻습니다.
주지스님은,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닭을 한 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유기는 도대체 흙닭속에 무엇이 있길래 궁금한 유기는 흙닭을 깨뜨려 버립니다.
이 안에서 글발이 적인 조그마한 종이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이 두루마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 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
유기는 자신도 흙닭을 하나 빚어 시험에 보았으나 울기는 울데 도대체 일정한 시간없이 밤낮으로 울어댑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기는 제갈공명에 대한 평가를 다시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자신을 우위에 놓고 있었지요.
3. 제갈공명을 인정하다
다음날 유기는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섭니다.
제왕이나 위인들의 사당에 참배하려면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사당에 이르기 일정한 거리에서 모두 말에서 내리기로 되어있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기는 이 하마비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말을 타고 통과하려 하였지요.
제갈량을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마비를 통과하려는 순간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말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유기는 말에서 내려 종자로 하여금 말발굽 밑을 파보도록 합니다.
그곳에서는 유기를 훈계하는 듯한 내용의 글발이 나옵니다.
"때를 만나면 천지도 함께 힘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운수가 없으면 영웅의 계략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유기는 머리를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퍼뜩 듭니다.
마치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듯한 생각이 들어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지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제갈 공명을 칭찬하던 사람들을 비웃었던 유기는 2번에 걸친 공명의 신통력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후 공명의 사당 참배를 마친 유기는 공명의 묘소로 발길을 옮깁니다.
그런데 공명의 묘소가 시야에 들어오자 유기는 의문이 듭니다. 공명의 묘소 뒷쪽에는 큰 명당자리가 있는데도 공명의 묘소는 보잘것 없는 묏자리에 모셔졌기 때문이지요.
유기는 과연 공명이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유기는 참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이상하게도 무릎이 땅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몰라 그 위치에서도 그곳을 파보니 아래와 같은 글발이 나옵니다.
"충신은 죽어서도 제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
라는 글발이었지요.
"내가 어찌 지리를 모르겠는가? 죽어서도 제왕을 모시기 위하여 이 곳에 묻혔음을 알라"라고 공명이 이야기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유기는 감탄한 나머지 한숨을 몰아쉬며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합니다.
"유사 이래 현세에 이르기까지 공명만한 사람이 없고, 역사가 이어지는 영원한 앞날에서도 공명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 (전무후무 제갈무후)
유기는 마침내 제갈공명에게 머리를 숙이고 지난날의 그릇되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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