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막장 내전, 사마씨 서진의 팔왕의 난

cky0214 2024. 2. 1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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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씨(초대 사마염, 사마의 손자)의 진()나라는 중국 위촉오 삼국 분열시기를 마무리하고 전국을 통일합니다.

 

그러나 통일이후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삐걱거리더니 결국에는 각 지방 왕들에 의해 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며 5호16국시대를 여는 빌미를 제공하지요.

 

팔왕의 난

 

실질적으로 진나라가 무너지는 사건은 영가의 난이지만, 이것의 원인은 팔왕의 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후 중원은 송나라가 건국되는 10세기까지 무려 600년 이상 북방 이민족들의 독무대가 되지요.

 

이번 post에서는 서진 멸망의 원인 팔왕의 난에 대해 알아봅니다. 선비족 post도 같이 재밌게 봐주시구요.

 

 

선비족의 유래와 역사 및 기원, 선비족이 세운 나라 인물들

5호 16국 시대 이후로 선비족은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를 세웠으며 역사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오랑캐로 취급받았던 적도 있었으나 4세기 초반 연나라의 건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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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


1. 사마염의 실책

진나라 이전 위나라의 조조는 외척과 황족, 환관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합니다.

 

그의 두 눈으로 십상시의 난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때문에 측근들의 힘을 항상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에 황실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실제 사마의가 실권을 잡는 고평릉의 사변은 이러한 위태로운 상황이 표출된 사건이었지요.

 

사마염

 

진 세조 무황제 사마염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제위 초기부터 황권강화에 힘썼습니다. 

 

위나라와는 다르게 황족을 중심으로 일종의 봉건제를 실시하기에 이릅니다. 

 

각 지방에 황족을 배치하고 막대한 권력을 집중시켜 주게 됩니다.

 

진나라 황족

 

왕으로 책봉된 황족에게 지방관리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게 인사권과, 277년부터 최대 5000명에 이르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에 이르지요.

 

그러나 아직 사마염의 생전에는 중앙정치에서 거대 문벌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고, 두예, 장화, 호분, 양호와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어느정도 장악하고 있어서 황족들을 어느정도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265년 27명의 황족 및 왕족을 임명하는데, 허가받은 사병은 5천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80년 삼국이 통일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주자사), 군정권(주도독)을 분리하고 분리된 군 정권까지 모두 황족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바야흐로 황실 왕족이 인사권, 군사권까지 모두 가지고 지방에 할거한 상황이 이르게 되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진 초대황제 사마염이 사망하고 이후 즉위한 멍청한 황제 사마충대에 이르러 모든 것이 어그러지게 됩니다. 

 

외척의 등장과 횡포로 결국 중국사 최대 막장 내전의 시작과 이민족의 침입이 시작됩니다.


2. 외척의 농간, 가남풍

팔왕의 난은 외척의 농간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무제 사마염의 황태자 사마충은 너무 어리석고 백치라 한때는 자신의 동생 사마유에게 양위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사마유가 무제보다 먼저 죽어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충

 

290년, 천하를 통일한지 10년만에 무제 사마염이 5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죽기전 그는 후사를 황후 양씨의 아버지, 장인 양준과 황족의 원로인 사마양 두 사람에게 위탁하지만 양준의 방해로 사마양은 수도 낙양으로 오지 못하고 결국 양준이 홀로 후사를 위탁받습니다.

 

물론 이는 양준이 홀로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서였지요.

 

 

 

이에 따라 황태자 사무충이 혜제로 즉위하고 황후 양씨는 황태후로, 정치적 실권은 양준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름아닌 혜제의 황후 가남풍이었습니다. 가남풍은 얼굴이 못생기고 키가 작고 피부색까지 검었으며, 질투심이 강하고 권모술수가 뛰어난 여인으로 가만히 앉아 당할 인물이 아니었지요. 

 

가남풍

 

이런 여성이 황태자비로 간택된 데는 그녀의 아버지 가충이 사마소(무제 사마염 아버지)의 반위 쿠데타의 일등 공신이며, 오나라 토벌 당시 뇌물공세를 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남풍은 양씨를 제거하고 가씨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가황후는 양씨의 반대파인 맹관, 이조, 동맹등의 중신들과 쿠데타를 추진하게 됩니다. 


3. 쿠데타의 성공

가남풍은 이조를 여남왕 사마양에게 보내 군사를 일으키도록 종용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사마양은 무제 사마염이 후사를 부탁하지만 양준의 농간으로 권력을 잡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사마양은 나이가 많았고 소극적이라 권유를 받았지만 전쟁을 피하기 위해 허창으로 피해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조는 다시 초왕 사마위에게 접근합니다.

 

사마위

 

초왕 사마위는 혜제의 이모제 뻘로 용맹하고 젊은 21세의 청년이었습니다. 291년 2월 형주의 도독이었던 초왕 사마위는 이 권유를 듣자마자 즉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진군합니다.

 

낙양으로 진군한 사마위는 양준에게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고, 그의 일당을 모두 체포,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양태후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양태후의 어머니 방씨 또한 처형해버리게 됩니다. 양태후는 단식 끝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되지요.

 

이로써 양씨의 천하가 끝나고 가씨의 천하가 열리게 됩니다. 가남풍은 이 신정권으 중신으로 황족의 원로인 사마양과 72세의 노신 위관을 기용하여 사마양을 태재로, 위관을 태보로 삼습니다.

 

팔왕의 난

 

이 두사람은 누구한테도 불만을 사지 않는 원로 대신으로,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온화한 정권처럼 보였지만 이는 가남풍의 음융한 방패막이 공작에 불과했습니다. 

 

정권을 독점하려는 가남풍의 입장에서는 사실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이 두 사람이었고, 이를 실컷 이용해 먹고 제거해 버리자는 단수 높은 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질적인 공은 초왕 사마위였고, 두 원로대신이 전면에 서자 매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가남풍의 술책에 말려들게 된 것이죠.


4. 토사쿠팽과 태자 살해

사마위와 두 원로대신은 서로 앙심을 품게 되고, 이 상황을 이용하여 가남풍은 두 원로대신에게 모반의 죄를 씌워 사마위로 하여금 이들을 치게 명합니다. 

 

사마위는 군대를 출동시켜 이 둘을 잡고 처형을 하게 되지만, 가남풍은 한 술 더 뜨게 됩니다.

 

혜제로 하여금 사마위를 사형에 처한다는 조서를 내리게 하였고 결국 사마위는 죽음에 이릅니다.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사마위는 비로소 자신이 가남풍에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써 가남풍과 가씨 집안은 조정내 모든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독점하기에 이릅니다.

 

여남왕 사마양과 위관, 초왕 사마위가 제거된 후인 291년부터 300년까지 10년동안 큰 사건 없이 가씨 일가의 천하는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남풍의 똥볼을 차게 되니 바로 황태자 사마휼을 죽이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지요. 

 

사마휼

 

사마휼은 가남풍의 자식이 아닌 의붓아들이었고 똑똑했기 때문에, 양자로 맞이했던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죽이려 합니다.

 

각지의 사마씨들은 이 기회를 틈타 반격을 준비합니다.

 

300년 3월 폐서인이 된 황태자 사마휼이 결국 살해되기에 이릅니다.

 

 


5. 치열한 내전의 시작

황태자 자리가 비고, 가남풍의 전횡이 날로 심해지자 결국 각지의 사마씨 왕들의 봉기가 시작됩니다.

 

제일먼저 일어난 것은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입니다. 사마륜은 사마의의 막내아들, 사마경은 무제 사마염의 조카입니다.

 

팔왕의 난 계보

 

이 둘은 군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진군하여 가남풍과 그의 일족의 씨를 말리고 권력을 잡습니다. 

 

그러나 조왕 사마륜이 301년 친히 황제에 오르고 혜제를 태상황으로 받들자, 나머지 사마씨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킵니다.

 

같이 가남풍을 쳤던 제왕 사마경이,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과 연합하여 황제를 칭한 조왕 사마륜을 쳐 죽이고 다시 혜제를 황제로 세우는 한편 제왕 사마경이 혜제를 보좌하게 합니다.

 

이번 조왕 토벌 때 제왕의 군사가 위기에 빠지자 성도왕 사마영의 군대가 이를 구원하는 등 동족간의 연대감과 정의가 어느정도 남아있긴 했었으나 이미 그들은 지방군벌의 하나로써 개인이라 볼 수 없었지요. 

 

사마경

 

제왕 사마경은 대사마로서 혜제를 보좌하였으나 큰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등 주색에 빠졌고 정치를 등한시 하게 됩니다. 

 

같이 조왕 사마륜을 물리친 장사왕, 성도왕,하간왕은 이러한 제왕의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되고 결국 각각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처들어옵니다.

 

제왕 사마경은 살해되고 이번에는 사마예가 권력을 잡습니다. 이 때부터 이들 3왕 사이에 분쟁이 시작됩니다. 

 

 


6. 지속되는 내전과 이민족

어느정도 평화가 유지되는가 싶더니 황태제 자리를 두고 장사왕 사마예와 성도왕 사마영이 충돌합니다. 

 

하간왕 사마옹이 성도왕 사마영에게 황태제 자리를 노리라며 부추기자 이 둘과 사마예 사이에 개판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사마예는 살해당합니다.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온 것이죠.

 

이 장사왕 사마예의 축출 과정에서 지방 주둔군 외에 이민족까지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이민족의 힘도 같이 커지게 됩니다. 

 

사마예 살해 이후 승상으로 오른 성도왕 사마영은 황후 및 황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황태제가 됩니다. 혜제 이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동해왕 사마월과 예왕 사마치는 성도왕 사마영의 이같은 처사에 불만을 품었고, 군대를 이끌고 성도왕 사마영의 본거지인 업성을 공격합니다.

 

사마월

 

비록 첫 공격은 실패하고 사마월은 돌아갔지만 동해왕파인 유주자사 왕준과 병주자사 사마등이 탁발선비 및 여러 선비족을 거느리고 사마월을 지원하고, 이에 맞서 성도왕 사마영은 흉노족의 유연을 끌어들여 다시 대립구조가 서게 됩니다.

 

그러나 사마영이 업에서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겁먹어 낙양으로 튀게 되고, 이를 목격한 흉노족 유연은 몹시 실망하여 업성을 빠져나온뒤 독립을 선언하게 되지요. 이것이 훗날 서진을 멸망시키는 영가의 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7. 난의 마무리

혜제를 끼고 낙양으로 달아났던 성도왕 사마영은 완전히 권력을 뺴앗기고, 혜제와 함께 다시 장안으로 옮겨갑니다. 

 

권력을 차지한 사마월은 또다시 거병하여 사마영 일파였던 하간왕 사마옹을 공격하고, 사마옹은 사마영을 다시 하북으로 불러 사마월과 싸우게 합니다.

 

사마영은 훗날 사마옹이 패망한 후 사마효에게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팔왕의 난 마지막 싸움인 이 하간왕 사마옹과 동해왕 사마월의 싸움은 말 그대로 개판 오분전 개싸움이었는데, 이 둘의 싸움에 각지의 주자사, 태수, 모든 사마씨 종친 왕들이 다 끼어 들어서 완전 난장판이었지요.

 

 

 

결국 동해왕 사마월 편이었던 유여,유곤 형제가 하간왕 사마옹 편인 유교에게 대승을 거두고 대세가 사마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사마옹은 결국 패망하게 되고, 사마월은 장안을 함락시키로 혜제를 다시 낙양으로 데려왔으며 이 과정에서 사마옹은 살해당합니다.

 

그 동안 혜제가 붕어하고 사마월은 사마치를 제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영가의 난의 피해자 회제입니다. 

 

사마치, 진 회제

 

그러나 권력은 동해왕 사마월에게 있었으며, 이로써 6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은 일단락됩니다. 

 

 


8. 시간 순으로

291년 이래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291년 이후로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하여 공격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하여 공격이 계속되며 나댈 놈도, 공격할 놈도 없어지며 끝났던 막장 내전이었지요. 

 

팔왕의 난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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