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대거란 전쟁 흥화진의 영웅, 처절한 고려 양규 장군 이야기

cky0214 2024. 1. 1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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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요나라(거란)의 30년에 걸친 전쟁에서 여러 영웅이 있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양규 장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마무리되었던 고려,거란(이하 여요전쟁) 1차 전쟁 이후, 강조정변을 명분으로 요나라 성종의 40만 친정으로 2차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3차는 귀주대첩). 

 

양규장군

 

양규 장군은 2차 여요 전쟁 당시 고려 최북방 국경 흥화진의 수비를 맡아 요나라 성종 40만 대군의 공격을 단 3000명으로 1주일을 막아내며 현종의 몽진의 시간을 벌어주었고, 퇴각하는 성종의 병력을 끝까지 추격하여 고려 백성을 구해내는 등 놀라운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이번 post에서는 양규 장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목차

1. 인물사

2. 2차 여요전쟁 발발

3. 양규장군 대활약상

4. 양규장군의 최후


 

양규장군


1. 인물사

고려 초기인 11세기 초에 벌어진 제 2차 여요전쟁 때 활약한 무장입니다.

 

 

거란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성종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을 때 소수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한 명장이지요.

 

고려사에서는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과 함께 고려의 용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규 장군

 

1차 여요 전쟁의 서희, 3차 마지막 여요 전쟁에서의 강감찬이 있었다면 2차 전쟁에서는 도순검사 양규가 암울했던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구국의 명장입니다. 

 

전쟁 이전 초년기 양규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양규열전"에 고려 제 7대 목종(천추태후 아들)의 치세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낭중이 되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6대왕 성종의 말년이나 목종 재위 기간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보입니다.

 

흥화진

 

그러다 강조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옹립되자 이를 명분으로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병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는데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로서 고려 최북방 흥화진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겨우 3000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게 됩니다. 

 

 

강조정변 후 강조의 후임으로 도순검사가 되었는데, 정변 직후 군인사는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강조의 후임으로 선임된 것으로 봐서는 강조와척을 지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양규장군

 

흥화진 전투에서 성종의 40만 군을 1주일이나 버텨낸 후, 성종이 흥화진을 pass하여 진군을 계속하자 유격대를 조직하여 성종의 뒤를 정말 끈질기고 귀찮게 추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을 구하고, 요나라 군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거란이 차지했던 최후의 전진기지 곽주성을 탈환함으로써 거란 퇴각의 한 요인을 만들어내었지요.


2. 2차 여요전쟁 발발

당시 거란 성종의 요나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소태후의 섭정시절 중국 송나라를 정벌하며 전연의 맹약으로 명실상부 중원과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우뚝서게 됩니다.

 

그 발톱은 고려에게도 뻗혀 고려를 침공하게 되지만 1차 전쟁 시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와 군신관계를 약속받으며 일단 물러나게 됩니다. 

 

요나라

 

하지만 고려는 여전히 송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있었고, 이를 지켜보며 고려 침입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거란 요나라 성종은 강조정변을 명분삼아, 1010년 40만 대군을 친히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게 됩니다(2차 여요 전쟁).

 

 

고려의 최북방 흥화진에 도착한 성종은 11월 17일부터 1주일간 흥화진을 맹 공격합니다. 

 

그러나 양규장군의 3000명의 결사대는 흥화진 성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40만 대군이 1주일 동안 공격해도 성벽을 넘지 못하자 성종은 항복권유를 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더 지체할 수 없었던 거란 성종은 20만의 대군을 흥화진 근처 무로대에 주둔시킨 후, 직접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을 pass하여 남하를 시작합니다. 

 

여요 2차 전쟁

 

남하한 후 통주성 인근 벌판에 대기하고 있던 강조의 30만 대군을 물리치고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합니다.

 

이후 남하하였지만 통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 곽주성을 함락시켜 6천명의 수비군을 남기고 다시 개경을 향해 남하합니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지요. 이후 거란은 남하하면서 서경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양규장군의 진짜 맹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3. 양규장군 대활약상

서경이 요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던 1010년 12월, 양규 장군은 흥화진에서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내려와 추가로 1000명의 군사를 수습 및 결사대에 합류시킵니다.

 

흥화진 남쪽 무로대에 20만 대군이 있었지만, 이 포위를 뚫고 통주까지 부대를 운용해 군을 늘렸던 것이지요. 

 

곽주 탈환

 

이 1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중간기지로 점령했던 곽주성을 공격하고, 6천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시켜 성을 탈환합니다.

 

순식간에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붙잡혀 있던 고려 백성 7000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합니다.

 

거란군이 중간기지로 삼은 이 곽주를 탈환함으로써 사실살 2차 여요 전쟁의 승기가 고려에게로 살짝 넘어가게 되지요. 전쟁 중 가장 극적이며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거란군은 진군 도중의 유일한 전진기지였던 곽주성을 빼앗겨 개경을 함락했음에도 후퇴를 하게되는 이유가 생겼던 것입니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군의 손에 계속 있었다면 거란군은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했을 것이며 이후 남하하여 서경을 쉽게 함락했을 것입니다. 서경이 함락되었다면 개경 뿐 아니라 전국이 거란손에 쉽게 넘어갔을 것입니다.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한 데다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란군은 서경도 pass하고 1011년 1월 1일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웠으나 이미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 뒤였습니다.

 

이미 추운 겨울에 강행군으로 지쳐버린 성종은 현종이 멀리 몽진을 이미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는 추격을 마무리하고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만약 양규 장군이 전방에서 버티지 못했다면 성종은 오랜 기간 전쟁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현종 몽진

 

고려 성종은 고려인 포로 수만명을 납치하여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 1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때 맞춰 양규도 거란군 20만이 버티고 있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2000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000명을 구출해 냅니다.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전투를 치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의 후미를 공략했습니다.

 

계속 이수에서 석령까지 추격해 2500명의 거란군을 죽이는 동시에 고려인 1000명을 구출했고, 3일 뒤 여리참에서 3번에 걸친 전투를 벌여 1000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또 고려인 1000명의 포로를 생환시켰습니다. 

 

양규 활약

 

이렇듯 양규장군은 지칠대로 지쳐있는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4. 양규장군의 최후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도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명의 수급을 벴습니다.

 

그런데 이 애전에 거란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 대군이 나타났고 황제의 친위군이었던 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하게 됩니다. 

 

 

양규와 김숙은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결국에는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게 됩니다.

 

 

최근 방영중인 고려-거란 전쟁에서 양규의 최후도 장엄하게 그려냈지만, 개인적으로는 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양규장군의 싸움도 꽤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드라마 천추태후 양규

 

양규장군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양규장군 전사

 

양규장군은 원군도 없이 한 달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웠고, 장군이 구출한 고려 포로는 무려 3만명에 달합니다.

 

또한 노획한 말과 낙타, 병장기도 수없이 많았지요. 양규장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분투는 거란군으로 하여금 무려 400km에 달한는 고립을 강요하였고(곽주성 탈환), 이로인해 거란의 조기 퇴각의 빌미를 만들었습니다. 

 

 

장군의 사후,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게 됩니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합니다.

 

이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입니다. 말 그대로 개국공신과 다름없다고 인정한 셈이지요. 그의 아들 양대춘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고 이후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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