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어가를 끝까지 보필한 보국공신, 송나라 후손 고려 문신 채충순

cky0214 2024. 1. 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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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은 고려 초기 목종~정종 시기의 문신으로 제8대 현종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또한 거란과의 2차 전쟁 시 현종의 몽진과정을 끝까지 함께한 몇 안되는 충직한 신하였지요. 

 

채충순

 

부임시절 백성을 보호하는 여러 정책들을 제안함으로써 고려 내부의 안정을 가져온 인물입니다.

 

이번 post에서는 고려 문신 채충순에 대해 알아봅니다. 현종에 대한 post도 같이 재미있게 봐주세요.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현종, 기구한 유년시절의 대량원군 왕순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제8대왕 현종, 그의 삶은 파란만장 했습니다. 왕실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유년 시절을 머리를 깎고 절에서 보내야 했으며, 각종 살해 위협으로부터 몸을 숨겨야 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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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순


1. 채충순의 생애

채충순에 대한 기록은 명확한 것이 없습니다. 그의 사망 시기가 1036년 5월 15일 정종 2년에 사망한 기록만이 있습니다.

 

고려사에 적힌 채충순 열전에 보면, 그의 족보를 알 수 없다고만 적혀있다고 합니다.

 

채충순

 

그러나 광종 때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를 한 채인범의 아들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채인범의 묘지명에 따르면 채인범은 송나라 천주 출신이며, 귀화 후 청하군대부인인 최씨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현종 때 내사시랑 동내사문평하장사 감수국사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종 때의 상서우복야로 추증된 채충순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 현종을 옹립하다

목종 때 여러차례 승진해서 중추원 부사, 급사중에 임명됩니다.

 

목종 말기인 1009년(목종 12년) 고려 궁궐에서 벌어진 화재로 충격을 받고 목종이 병석에 눕자 최항, 유진과 더불어 궁궐에서 숙직을 하게 됩니다.

 

병석에 누운 목종이 채충순만을 따로 불러 목슴을 위협받고 있다는 대량원군의 편지와 유충정의 김치양 탄핵 서찰을 보여주며, 최항과 함께 대량원군을 궁궐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대량원군 왕순

 

이에 채충순은 편지를 보고, " 형세가 급박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라고 아뢰었고 이에 목종은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나의 병이 점점 위독하여 곧 세상을 뜰 것 같은데,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만 남아있소. 경과 최항은 평소 충의를 지닌 신하이니 정성을 다해 나라를 바로잡고 구원하여 사직을 다른 성()에게 주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게 되지요.

 

여기서 다른 성은 김치양의 김씨를 의미합니다.

 

 

채충순은 최항등과 의논한 뒤 당시 선휘 판관인 황보유의를 천거하고 그로 하여금 대량원군을 데려올 것을 건의하였고, 목종의 지시에 따라 대량원군에게 내릴 글의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황보유의

 

당시 대량원군은 삼각산의 신혈사에 있었습니다. 채충순은 목종에게 "문반과 무반 각 한 사람씩을 뽑아 군교를 거느리고 가서 맞이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한 뒤 군교들이 많아 행군이 더디면 일을 그르칠까 십여명만을 보내게 이야기 하지요. 

 

이렇게 쓴 편지를 황보유의에게 맞기고 신혈사로 가서 대량원군을 맞이하여 왕으로 옹립하니 이 왕이 바로 고려 전성기를 연 현종입니다.


3. 어가를 호위하다

현종이 옹립된 후 중요한 역할을 한 채충순은 현종 즉위 직후 직중대에 임명되고 얼마 안되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임명됩니다.

 

현종 재위 직후 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남쪽으로 몽진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 채충순은 왕과 어가를 호종했는데, 이 몽진 길에 지방 호족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다른 신료들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지지만 채충순은 끝까지 현종을 보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종 몽진

 

채충순, 충숙, 장연우, 주저, 유종, 김용인만이 떠나지 않고 현종을 보필하지요.

 

이러한 충직한 모습 때문에 전쟁이 끝난 해에 비서감, 중추사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인 현종 3년에는 예부상서에 임명되고, 현종4년에는 중추원사로서 거란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또한 추충진절위사공신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에 책봉되었고 식읍 300호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끝까지 현종을 보필한 채충순은 조정 내에서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치며 성장합니다.


4. 승진을 거듭하다

현종 7년 예부상서, 현종8년 좌산기상시 충추사, 현종 9년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계속 임명되었고 현종 9년에 발발한 3차 거란과의 전쟁 후 현종 10년에는 제양현개국남에 책봉되어 식읍 300호를 받습니다. 

 

이 때 군사들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80세 이상인 자가 있다면 군역을 면제하여 부모를 봉양하게 하고, 신하들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으로 다른 형제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외직에 임명되지 않게 하는 법을 건의합니다.

 

채충순

 

또한 부모가 병이 나면 200일의 휴가를 부여하여 돌보게 하는 내용을 현종에게 건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집니다.

 

 

현종 12년에는 황명에 따라 주저와 더불어 "현화사 비문"을 지었는데, 채충수는 뒷면의 비문을 맡아 작성하게됩니다.

 

같은 해 검교태위 제양현 개국자에 책봉되고 식읍이 500호로 늘어나게 되며 보국공신으로 칭호가 오르게 됩니다.

 

현종 13년에 내사시랑평장사 겸 서경유수, 현종14년에 태자소사, 현종 16년에 판상서예부사, 현종 18년에 문하시랑 평장사에 연이어 임명됩니다.

 

이후 현종 21년에 판서경유수사로 임명된 후 사직을 요청하게 되지만, 강감찬처럼 거부당했다가 덕종 1년인 1031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하고 집에서 쉬게 됩니다.

 

5년후인 정종 2년(1036년)에 충직한 문신 채충순은 세상을 떠납니다. 

 

채충순의 시호는 정간(貞簡)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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