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현종, 기구한 유년시절의 대량원군 왕순

cky0214 2023. 11. 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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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제8대왕 현종, 그의 삶은 파란만장 했습니다. 왕실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유년 시절을 머리를 깎고 절에서 보내야 했으며, 각종 살해 위협으로부터 몸을 숨겨야 했었지요. 또한 왕실 내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출신으로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고려 현종

 

거란과의 2차 전쟁에서 몽진을 선택하면서 고난을 겪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이런 유년시절과 전쟁의 아픔을 모두 이겨냈고, 비록 강조정변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이후 여요전쟁을 훌륭히 치뤄내고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성군중의 성군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번 post에서는 현종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강조정변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인가, 강조정변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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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왕순의 탄생비화

2. 불우한 유년시절

3. 즉위 후 개혁과 거란 2차 침입

4. 고단한 몽진길

5. 거란3차 침입과 평화의 시대


 

고려 현종


1. 왕순의 탄생비화

고려 제 8대왕 현종( 顯宗 ,재위:1009년~1031년)의 본명은 왕순입니다.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 휘는 순, 자는 안세(安世)입니다. 992년 8월 1일생으로 신라 왕실의 외손자이기도 하지요.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작위는 대량원군이었고 태조의 아들 안종과 헌정황후 황보씨의 아들입니다. 

 

고려 현종

 

992년 태조 왕건의 아들인 안종 왕욱(제5 왕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과 경종의 제 4비 헌정왕후 황보씨(천추태후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종이 죽자 과부가 된 헌정왕후가 숙부인 안종 왕욱과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현종인 왕순입니다. 

 

현종 가계도

 

현종의 가계도는 위 그림과 같이 매우 복잡한데요, 우선 아버지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헌정왕후는 왕건의 손녀였습니다. 즉 둘은 삼촌과 조카 관계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이 정상적인 혼인 관계가 아닌 그냥 남녀사이 관계였던 것입니다. 

 

 

현종 어머니 헌정왕후는 원래 고려 국왕인 경종의 4번째 왕비였으나 981년 경종이 사망하면서 그의 제 4비 헌정왕후는 궁궐밖의 왕륜사의 개인 집에서 나와 살던 중 이웃에 왕욱(안종)과 자주 교류하면서 결국 정을 통해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왕비는 아무리 왕과 사별했어도 재혼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혼외로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은 왕가의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사실이 밝혀지자 당시 국왕인 성종은 삼촌뻘인 왕욱을 귀양보내기에 이릅니다. 

 

왕욱 헌정왕후

 

왕욱이 귀양간 후 얼마 뒤 헌정왕후가 왕순을 낳는 도중 산고로 사망하였고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다시피(왕욱은 유배감) 한 현종은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자랐습니다. 비록 불륜으로 탄생했지만 부모가 모두 왕족이고 헌정왕후는 성종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성종은 조카인 현종을 아들처럼 기른 것이지요. 궁에서 자라기 시작한 왕순을 성종은 매우 아꼈으며 왕순을 볼 때마다 여동생 헌정왕후가 생각났는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귀양보낸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어 같이 있게 합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에서 함께 살았고,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2. 불우한 유년 시절

한국사에서 현종은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즉위하기 전 봉호는 대량원군이었으며,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지요. 태어나자마자 암울한 전란의 시대(거란전쟁)를 살았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5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셔 거의 고아나 다름없었습니다. 

 

왕순

 

왕순은 성종의 보살핌아래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살 때인 목종 6년 목종의 친어머니이자 왕순에게 이모인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게 되었고 이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왕순의 머리를 밀어버리고 그를 숭교사에 보내 승려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이모의 손에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에 자주 자객들이 들이닥치자 고려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 신혈사(지금의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여러차례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자신의 목슴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곳에 대피시킨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습니다. 

 

이후 1009년 2월 강조정변에 의해 목종이 폐위당하자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며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8세였습니다. 


3. 즉위 후 개혁과 거란2차 침입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옹립시킨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에 앉히고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즉위한 그달에 교방(음악을 가르치던 기관)을 없애고 목종대에 늘어난 궁녀수를 대폭 줄이는 혁신적 조치를 내렸으며, 향락에 사용된 진귀한 새와 짐승들을 산천으로 돌려보내는 등 목종대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쇄신하였습니다. 

 

 

현종은 역대 국왕 중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죠. 거란 침입 이후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자 화려한 밥상을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으며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죠. 현종 역시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호불숭유의 경향이 강했습니다. 어릴적 절과 승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이 그의 호불적 성향이 되도록 한 것이겠지요. 즉위하자마자 성종이 폐지시킨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습니다. 

 

연등회 팔관회

 

그러나 그의 의욕적인 개혁이 막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 거란 침입이라는 전란을 겪게 되고, 어린 시절부터 온갖 수난을 겪은 현종은 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험난한 고초를 겪게 됩니다. 

 

 

1010년 10월 거란의 성종은 목종의 폐위 사건(강조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입하게 됩니다. 고려-거란 2차 전쟁이 발발한 것이지요. 강조가 30만의 대군으로 상대하였으나 퉁주 인근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혀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듬해 정월 거란군은 개경을 향해 진군하게 됩니다. 당시 고려 조정은 화친쪽으로 기울었으나 예부시랑 강감찬의 반대로 항전태세로 방향을 바꾸고, 현종은 개경을 떠나 머나먼 몽진의 길을 가게 되지요.


4. 고단한 몽진길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한 후, 강감찬의 권유로 현종은 몽진을 떠나게 됩니다. 지채문의 호종을 받으며 나주까지 피신 후 환도했는데, 이때의 몽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12월 밤, 현종은 2명의 왕비와 이부시랑 채충순 및 지채문등이 이끄는 금위군 50명과 함께 개경을 떠났지요. 태조 왕건 이래 왕이 적을 피해 개경을 떠나기는 이때가 처음입니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는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됩니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지요. 이 기간에는 고려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 거란과 싸우게 됩니다. 

 

현종의 피난길

 

현종이 강조 정변으로 등극한 왕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이 현종이 남행한다는 소식을 듣자 죽이려 한 것이지요. 현종을 구한 치채문은 북방 동북면에서 거란 및 여진을 방어하던 장수였는데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를 알리기 위해 개경에 와있던 중 현종의 호위 임무를 자칭한 장수입니다. 

 

몽진 도중 여러 고초를 겪고, 이를 기지로 이겨낸 호위무사 지채문은 우연히 하공진을 만났고 이 하공진은 현종을 만나 거란을 물리칠 계책을 아뢰게 됩니다. 하공진 왈, 거란의 침입 명분은 역적인 강조를 치기 위해서이고 이미 강조를 죽였으니 화해를 요청한다면 철군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현종은 그럴듯하다 여기고 하공진을 거란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이때 이미 거란군의 추격은 창화현까지 도달한 상태였지요. 하공진이 거란의 성종을 만나고, 성종은 현종이 있는 곳을 물었고 하공진은 이미 멀리 남쪽으로 떠났다고 둘러댔고 이를 들은 성종은, 이미 추운 겨울 병사들이 지친 상태에 추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요. 이에 고려의 화해 신청을 받아들이게 되고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하공진은 그를 포로로 데려갔으며 평생 거란에 잡혀있다 끝내 살해당하게 됩니다.

 

하공진

 

철수하면서 양규장군의 활약 및 고려 서북면 군사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과 피해를 입게 됩니다. 몽진하던 현종 일행은 나주에 닿았고 이곳에서 머물다 거란의 퇴각하는 소식을 접하고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5. 거란 3차침입과 평화의 시대

1014년 11월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습니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최질, 김훈등이 문신들을 잡아 현종앞에서 시위를 하게 되며 이를 현종이 받아들여 일단락 된 사건이 있었지요.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무신들을 부른 뒤 술에 취한 틈을 타 이들을 주살하게 됩니다. 이 때 19명의 장군들이 죽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지요.

 

 

이 사실을 듣게된 거란은 주요 무신들의 사망했으니 이를 이용하여 고려를 정복하고자 하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다시 처들어오게 되며 이것이 고려 거란 전쟁의 마지막 3차 침입입니다. 그러나 이미 현종은 동계에서 북계까지의 요충지에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거란 10만군의 원수 소배압은 어떠한 성도 차지하지 못한채 개경 근처까지 왔다가 후퇴하고 말지요.

 

귀주대첩

 

후퇴하는 적들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파하게 되며(귀주대첩)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거란은 멸망시까지 다시는 고려를 침입하지 못하였고 고려-거란-송 삼국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송나라는 거란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여 전연의 맹을 통해 매년 공물을 바치는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고려는 당당히 군사력으로 거란을 물리치며 자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지요. 고려의 위신은 맹위를 떨치게 됩니다. 이후 몽골이 침입할 때까지 130년동안 만주지역과는 별다른 큰 전쟁이 없었습니다. 또한 삼국의 평화속에 고려의 외교는 송과 요 사이에서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되지요. 고려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이 이후의 일입니다. 벽란도도 이 때 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평화의 시대, 현종은 민생에 주력하기 시작합니다.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을 제정하였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 수렴법을 실시했습니다. 세력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중용하여 요직에 발탁하였지요. 거란과 변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는 하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습니다. 

 

1031년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이며 시호는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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