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인가, 강조정변의 진실

cky0214 2023. 11. 1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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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주요 2대 정변은 초기 강조정변과 후기 무신정변입니다. 이 중 고려 초기 강조정변은 황제가 폐위되고 시해되었던 사건이며, 이로 인해 거란(요나라) 2차 침공의 표면적인 명분으로 작용을 하지요. 

 

강조정변

 

1009년(목종 12년)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 5000명을 동원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 강조정변, 단순히 권력을 차지하려는 강조의 욕심에 의한 정변이었을까요? 

 

이번 post에서는 강조 정변이 일어난 배경 및 일어난 원인등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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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강조정변 배경

2. 진행과 결과

3. 여러가지 의문점

4. 왜 정변을 일으켰나?


 

강조정변


1. 강조정변 배경

강조정변이 있기 십 수년 전, 고려 제 5대왕인 경종은 27세 젊은 나이에 붕어하였고 경종의 부인인 헌애왕후(천추태후) 황보씨는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천추태후의 외가쪽 친척인 김치양이 접근하게 되고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6대왕이며 천추태후의 오빠인 성종에 의해 김치양은 유배가게 되지만 성종이 붕어하고, 천추태후의 아들인 7대왕 목종이 즉위하며 상황은 돌변합니다. 

 

목종과 천추태후

 

목종의 나이 18세가 되어서도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였고 정치에 크게 관여하게 됩니다. 애인인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까지 파격 승진시키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됩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김치양은 요직에 자신의 인물들을 앉히고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되지요. 

 

 

천추태후의 아들인 6대왕 목종도 그런 김치양이 꼴보기 싫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 천추태후의 상심을 염려하여 그를 내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목종 그 자신도 유행간이라는 남자와 애인관계를 맺으며 문제를 일으켰으며, 또한 유충정이란 발해인도 총애하여 이 2명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천추태후 김치양 유행간

 

이러다 천추태후는 김치양의 아들까지 낳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제일 방해되는 천추태후 여동생의 아들 대량원군 왕순을 12세에 승려로 만들어 신혈사로 쫓아버립니다. 또한 사람과 독이 든 음식을 보내 죽이려고까지 하였죠. 

 

 

이처럼 중앙 정부에서의 일부 신하들에 의한 전횡,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권력 욕심등 여러가지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게 됩니다.


2. 진행과 결과

목종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올릴 생각을 하게되며,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왕에 옹립하고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며 여기에 유행간, 유충정의 전횡까지 아주 그냥 혼란의 조정이었습니다. 

 

이때 목종은 김치양이 유행간 유충정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보고받았고, 대량원군의 독살 시도, 숙직 신료들 중 한 명인 이주정마저 김치양에게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왕권 강화를 위해 대량원군을 세자로 삼으려 합니다. 또한 당시 서북면 도순검사를 맡고 있던 강조를 궁궐로 불러 자신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강조는 목종의 명령을 받자 급히 개경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중에 "김치양 일파가 이미 목종을 시해하고 북박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기 위해 왕명을 사칭했다"라는 소문을 듣게 되고 다시 서경으로 돌아갑니다.

 

강조 정변

 

이 후 천추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두려워해 절령을 봉쇄했으며, 이는 강조를 생포하기 위해 군사를 배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강조의 아버지는 "왕이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강조에게 전하게 되고, 이에 강조는 5천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지요. 그러나 평주에 이르러 목종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한참을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왕명없이 아버지의 편지만으로 군사를 움직인 것을 후회하였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왕명없이 군사를 일으킨 죄가 생겨버린 것이고, 더하여 부하들의 건의로 여기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목종을 폐위하고 조정을 바로잡기로 결정합니다. 

 

 

개경에 진입한 강조는 분사감찰 김응인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대량원군을 데려올 것을 명령하고 황궁에 들어가기로 합니다. 목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김치양 일당을 제거할 테니 일단 귀법사로 피했으면 한다는 내용을 전하게되고 곧장 개경으로 향하게 되지요.

 

강조정변 현종

 

개경에 도착한 강조는 곧장 궁궐로 달려가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천추태후를 비롯한 일당 30명을 귀양보내게 됩니다. 강조는 목종이 자신이 전한 내용대로 피신함을 확인하고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법왕사로 달아났던 목종은 말을 보내줄것을 부탁했고, 강조가 말 한필을 보내주자 충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부하들을 시켜 목종을 시해하게 됩니다. 

 

건덕전의 어탑아래에 앉아서 대량원군 일행을 기다리던 강조는 군사들이 만세를 부르자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라고 주위를 수습하고 현종을 왕으로 즉위시키게 됩니다. 

 

 

천추태후는 황보씨는 황주로 돌아가 21년 동안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년) 1월 숭덕궁에서 66세로 죽으니 유릉에 장사지냈습니다. 

 

최고 권력자가 된 강조는 중대사가 되었다가 이부상서 참지정사가 되었고 얼마 후 여요 2차 전쟁에 고려군 총사령관이 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과 맞서게 됩니다. 


3. 여러가지 의문점

표면적으로는, 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강한 권력욕을 실현하려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 나약한 목종과 유행간의 국정 농단, 또한 김치양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 이로인해 사직이 위태로워짐이 정변의 배경이라 하겠지요. 또한 당시 목종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이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이 많습니다.

 

고려 목종

 

우선 목종은 그리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행간이나 김치양 같은 자들의 전횡도 있었지만 목종은 재위 초중반 민생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북방의 많은 성을 새로 쌓았거나 보수했습니다. 외교에서도 균형있는 자세로써 송과 요나라 사이에서 무난한 외교를 이어 갔지요. 그리고 강조정변이 있을 당시 위독했다고 전해지는데 정말로 위독했다면 딱히 후환이 될 여지가 없는 목종을 폐위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목종의 동성애 성향으로 후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그리고 목종의 힘은 궁내에서 그다지 약하지 않았고, 김치양이 꼴보기 싫었으나 그를 내친다면 어머니인 천추태후의 마음이 상할 까 두려워 건들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듯 싶습니다. 

 

목종 암살

 

김치양이 전횡을 일삼고 대량원군을 암살하려고 했을 정도이며, 조정의 인사권을 모두 장악하고 모든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앉혔다면 강조나 목종의 움직임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사전에 차단하고 군사를 모아 충분히 대비할 시간적 여유와 정보가 있음에도 강조에게 당할 때 보면 정말 허무하게 당하는 것을 보면 과연 그정도로 권세가 대단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것이 맞나 의구심이 드네요. 

 

또한 강조정변 당시, 무신정변 처럼 정말 궁궐에 피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습니다. 

 

 

즉, 이는 현종과 쿠데타를 성공하고 권력을 잡은 강조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가 아닐까 의심이 들게하는 부분입니다. 김치양 부자 및 유행간 7명을 처형하고 양쪽 모두를 합해 30명만을 귀양보내는 아주 조용한 정변이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김치양과 유행간의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강조정변의 정당성이 부족했다라는 설명이 아니라, 굳이 이 타이밍에 정변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에서 적어본 내용입니다. 


4. 왜 정변을 일으켰나?

강조가 아버지의 편지로 목종의 승하소식 접하고 서경의 5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남진하게 되는데요, 내려오는 도중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고 망설이게 됩니다. 이 때 부하들의 권유로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라고 역사에 쓰여있습니다. 

 

강조정변

 

이후 혁명 성공 시 부하들이 만세를 불렀을 때도 이를 저지하며 다음왕을 기다려야 한다며 자중했던 모습, 여요 2차 전쟁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으며 적에게 붙잡혔음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강조였으므로 고려에 대한 충심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권력욕을 위해, 또 단순히 부하들의 권유로 이미 돌이킬 수 없다며 혁명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물론 진군 당시 목종이 살아있으므로 유행간 일파를 제거하려면 그를 비호하는 목종도 함께 제거해야 되고, 진군을 멈추고 나중에 목종이 이 사실을 알면 반역죄로 죽게 될 것이 뻔하지요. 그렇다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혁명을 할 만큼 간신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강조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적 어려움으로 인한 이유와 함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강조의 머리속에는 향후 다가올 거란과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서북면을 책임지면서 거란의 움직임을 듣고 있었을 것이고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을 빠른 시간내에 안정화시키고 전쟁을 대비하려는 생각도 일정부분 작용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행동일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도 듭니다. 뼈속까지 무인이었던 강조의 생각에는 나라를 하나로 묶어 전쟁에 대비하려는 생각이 아니었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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