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거란 40만을 뚫고 수 많은 백성들을 구하다, 거란헌터 김숙흥

cky0214 2023. 11. 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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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귀주별장 김숙흥은 고려-거란 2차 전쟁에서 양규장군과 함께 목슴이 다하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고려 백성들을 위해 거란과 싸운 인물입니다. 품계가 높지 않고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분들에게는 생소한 위인이시지요. 그러나 전쟁 당시 후방에서 끊임없이 거란을 괴롭혔고, 거란의 후퇴에 일조하는 인물입니다.

 

김숙흥

 

이번 post에서는 거란헌터 김숙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같이 활약한 양규장군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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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흥(金叔興)


1. 여요2차전쟁 발발 및 참전

고려 별장 김숙흥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역사서는 없습니다. 그의 출생관련하여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요. 다만 그의 말년 활약상과 전쟁 후 추증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본 post에서도 그의 전쟁에서의 활약상 위주로 적어봅니다. 

 

 

서기 1010년(고려 현종1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자, 거란 요나라 성종은 역신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섭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거란은 중국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연의 맹약을 통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상태였고, 남은건 고려 하나뿐이었으며 고려만 정복하면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강국 자리에 오르는 만큼 강조정변이 없었더라도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전연의 맹약

 

단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으며 강조의 정변은 침략의 명분으로서는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대의를 품고 목종을 폐위 및 살해한 강조였지만 오히려 거란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지요. 

 

 

이렇게 고려를 침략한 거란 성종은 흥화진 전투에서 성을 점령하지 못하자 군을 2개로 나눠 한 부대는 흥화진을 포위하고, 나머지는 통주, 곽주를 거쳐 개경으로 진격합니다. 통주에서 강조의 30만군을 궤멸하지만 통주성은 점령하지 못하고 곽주성만은 점령하여 전진 기지로 삼습니다. 이후 개경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죠.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을 떠나게 됩니다.

 

거란의 2차 침입

 

하공진이 사신으로 현종이 멀리 떠났음을 거란 성종에게 알리게되고, 성종은 고려의 입조와 강동6주 반환을 조건으로 퇴각을 하게됩니다. 후방의 성들을 함락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위 및 퇴각로가 막힐까 두려웠던 것이었죠. 이 거란군이 퇴각하는 중에 김숙흥이 대 활약하게 됩니다. 


2. 참전과 장렬한 최후

여요(고려 거란) 2차 전쟁 당시 김숙흥은 귀주에서 별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란군이 통주와 곽주 방향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개전 초기 거란과의 전투는 치루지 않았지요.

 

 

그러나 거란 성종의 퇴각부터 김숙흥이 활약하게 됩니다. 개경에서 퇴각할 때 귀주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이를 습격하여 거란군 1만명의 목을 베었지요.

 

이후 흥화진에서 나와 곽주의 병사를 흡수한 양규와 합류하게 됩니다. 김숙흥은 귀주에서 홍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하고, 양규는 홍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 거란군의 후미를 공략하게 됩니다. 이수와 석령에서의 승리 및 백성 구출, 여리참에서도 적을 섬멸합니다. 

 

 

1011년 음력 1월 28일 김숙흥은 양규장군(서북면 도순검사)과 합세하여 애전에서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평안북도 의주)에서 이 부대를 요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벱니다. 그런데 이 애전에 거란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 본대 대군이 등장하게 되지요. 거란 성종의 친위군이었던 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하게 됩니다. 

 

양규와 김숙흥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많은 적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다해 결국 휘하 고려군과 함께 장렬이 전사하고 맙니다. 양규와 김숙흥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에세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이유겠지만, 그동안의 싸움에서 구출한 수만명의 고려 백성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 전사

 

 

실제 이 전투는 두 장군의 엄청난 전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백성들을 구함으로써 추후 발생하는 3차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노동력을 보존했다는 면에서 정말 중요한 활약이었지요.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으로 거란에게 고려의 무서움을 어느정도 보여주었고, 외교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거란 성종의 멘탈을 흔들리게 했으며 큰 굴욕감까지 느끼게 해 주었지요. 친정을 나섰으나 중간의 성들을 대부분 점령하지도 못했고, 특히 고려 조정은 몽진으로 직접 항복을 받지도 못하였으며, 퇴각길에 엄청난 게릴라를 받아 포로를 모두 잃고 탈탈 털린 것이지요. 

 

 

거란 황제 성종의 군대는 양규와 김숙홍의 끊임없는 게릴라, 야습, 급습으로 인해 퇴각길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무기가 녹슬거나 말이나 낙타들도 죽는 등 귀국길이 험했으며, 국경 근처 압록강을 건너려던 순간 흥화진에서 정성장군이 뛰쳐나와 그들의 배후를 치게 됩니다. 이처럼 김숙흥과 양규의 분전은 백성을 살림과 동시에 거란군에 대항하는 군사들의 사기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3. 김숙흥 사후

전사후 김숙흥은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 급 대우를 받게 됩니다. 현종은 김숙흥을 장군직으로 추증했고, 어머니 이씨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귀주대첩으로 완전히 끝나자(현종 10년, 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공신녹권),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으로 공신호를 추증하게 됩니다. 이 공신호는 태조 왕건 시절 개국공신들에게 하사된 공신호입니다. 말 그대로 건국 공신과 다름없는 활약이었다고 인증해 준 것이죠.

 

훗날 문종은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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