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성종 40만 대군의 2차 고려 침입 당시, 고려 조정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되고 결국 개경까지 함락됩니다. 고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강감찬의 강력한 권유로 항복을 하지 않고 몽진에 나서게 됩니다. 머나먼 나주까지의 몽진길은 험하기 그지 없었지요. 특히 강조의 정변으로 황제에 오른 현종을 각 지방의 관리들은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때 현종을 호위하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채문입니다. 그는 전쟁 초기 서경을 방어하였고 나주까지의 힘든 몽진길을 끝까지 현종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지채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공진 이야기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지채문(智蔡文)
1. 서경을 방어하다
지채문(964년~1026년)의 본관은 봉주(鳳州)이며 자는 호간, 전쟁 후 상장군 우복야에 오르고 1등 공신으로 추증되는 인물입니다. 979년(경종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중랑장으로서 하공진 및 유종과 함께 고려 동북면의 화주(고려말 쌍성총관부)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같은 해 하공진과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거란 요나라 성종의 40만 대군이 처들어옵니다. 흥화진 공략에는 실패하지만, 곽주성을 차지한 거란의 성종은 곧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강조가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채문은 서진하여 탁사정과 함께 서경을 방어하게 됩니다. 시어사 최창과 더불어 강덕진(지금의 평안남도 성천)에 진을 쳤습니다.
이 때 거란인 유경이 강조의 패전 때 포로가 되었던 노의를 앞세워 서경성에 항복을 권유하게 되고, 서경 부유수 원종석등이 이에 응하려 하자 원종석의 항복문서를 가지고 가는 노의를 죽이고 문서를 불태웁니다. 서경 내부는 이미 항복론이 우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서경성은 지채문등의 지원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겨우 서경 내부의 도움을 받아 들어갈 수 있었지요.
하지만 입성하였어도 성안의 항복론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서경 유수 원종석은 지채문과 최창등의 설득을 거부하고 항복하려고 하였지요. 이에 지채문은 거란의 사절들이 돌아가는 길에 그들을 암살함으로써 항복이 불가능하게끔 조치합니다. 이후 탁사정의 군대와 합세해 서경을 방어하게 됩니다. 고려 조정이 시간을 끌기 위해 항복 사절을 보냈고 이에 거란은 서경을 점거할 병력을 보냈으나 지채문과 탁사정이 보낸 고려 정예기병이 이를 몰살합니다.
이후 첫 전투에서 탁사정과 함께 거란 3000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지만, 거란군을 추격하다 역습을 당해 패주하게 되고 결국 서경은 거란의 대군에 포위가 되었고 탁사정은 도망가고, 지채문도 개경으로 빠져나와 서경의 전황을 알리게 됩니다.
2. 현종을 호위하다
개경으로 돌아와 서경의 전황을 알린 그 때, 개경은 이미 항복론이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보낸 병력마저 상황이 그러했기에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조정 신료 대부분은 항복을 주장하였으나 예부시랑 강감찬만이 몽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현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머나먼 몽진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 때 지채문이 선뜻 앞에 나아가 현종의 호위를 자청하게 되고 현종은 이에 감동합니다. 금군 50명, 지채문, 채충순 등과 금군 50명, 추가로 왕후와 후궁등의 무리가 드디어 몽진길에 나서게 됩니다. 이 몽진길은 한국사 최고 고난의 몽진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주까지의 길에 별의 별일이 다 있었지요.
아무래도 현종이 강조 정변으로 즉위한점, 강조가 선대황제인 목종을 시해한 점에 대한 반감이 아직 많이 남아있던 터라 몽진 길은 정말 위험천만한 위기가 한 두번이 아니었죠. 현종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거란의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했던 까닭이지요.
내려가는 길에 적성현에 있는 단조역에 도착했을 때 군졸 건영이 단조역에 있었던 인원들을 모아 활을 겨누며 현종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때 지채문이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건영의 무리를 물리쳤습니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현종일행은 창화현에 도착했는데, 창화현의 아전이 현종에게 "왕은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라며 거만을 떨었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이때 이 아전은 하공진이 왕을 잡으러 온다는 소리를 질렀고 이 때문에 놀란 현종 일행 중 금군의 대부분이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이날 밤 결국 정채를 모르는 적들의 습격을 받게 되고, 두명의 왕후와 승지들, 그리고 지채문만이 현종의 곁을 지키게 됩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채문은 침착하게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두 왕후를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현종을 호위하며 탈출하였지요.
하공진을 잘 알고 있던 지채문은 밤의 습격이 하공진의 수작이 아닐것이라 생각하고 창화현으로 정찰가려고 요청하였으나 현종은 쉽게 보내주질 않습니다. 그러자 지채문은 "제가 임금을 버린다면 하늘의 천벌이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현종을 안심시키고 허락을 받습니다. 확인 결과 과연 하공진의 죄가 없음을 확인하였고 하공진의 병력과 함께 창화현에서 잃어버린 말과 안장을 되찾아 현종을 계속 남쪽으로 피신시키게 됩니다.
또한 내려가는 길에 두 왕후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자는 류종과 김용인의 주장에 지채문은 강력히 반대하며 인과 의를 저버리지 말자 간청하게 되어 두 왕후를 지켜냅니다.
전주에 다다른 어가 일행은 전주 절도사 조용겸이 군사들을 이끌고 현종이 머무는 전각 앞으로 전진했는데, 지채문이 전각의 문을 닫고 굳게 지켜 호위하였으며 지채문이 조용겸의 수하들 중 한 명을 질책하여 현종을 만나뵙게 하고 조용겸을 따르지 않게끔 하게됩니다. 전주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현종을 나주까지 안전하게 피신시키게 됩니다.
3. 전쟁 후의 삶
이듬해 2차 전쟁이 끝난 후 거란이 물러가고 지채문은 공주에서 현종을 호종(호위)한 공으로 전 30결을 받게되며 1016년(현종7년) 우상시를 겸했고, 1026년(현종 17년) 에 상장군 우복야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해 세상을 떠나고 말지요. 지채문의 사후 1031년(덕종 즉위년) 현종 때 남행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으로 추록되었고, 덕종은 즉위하자 아래와 같은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고 상장군, 좌복야 지채문은 선왕께서 남쪽으로 피신하셨을 때 홀로 충절을 온전히 지켜 으뜸가는 공훈을 세웠으니 이제 그 공훈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노라"
지채문은 2차 여요전쟁에서 젊은 현종을 호위하며 목슴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여려번 구했던 구국의 영웅입니다. 이때 현종이 무사하지 못했다면 고려는 멸망의 길로 빠졌을 겁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의 혼자 현종을 지켜내었고 사직을 구했습니다.
지채문은 강감찬과 더불어 환란 때 임금의 측근으로서 고려를 구한 영웅중의 영웅으로 불릴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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