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또 하나의 무신정변 김훈과 최질의 반란, 고려를 전쟁으로 빠트리다

cky0214 2023. 11. 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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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과 최질은 1010년 고려의 2차 전쟁 당시 강조의 30만 대군이 거란에 패하고 난 후, 거란의 진격을 막고 피해를 입힌 공으로 상장군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자리에 무장이 아니고 문신들이 되는 것에 불만을 품어 현종과 대립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김훈과 최질

 

거란과의 2차 전쟁 이후, 무신들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품은 김훈, 최질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약 4개월간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의 조정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거란과의 3차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번 post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김훈과 최질의 반란 사건에 대해 알아봅니다. 고려거란 3차 전쟁 및 귀주대첩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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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최질의 난


1. 공을 세우다

우선 두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010년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거란 성종의 40만대군이 침략하게 되며, 이것이 여요 2차 전쟁입니다. 강조의 30만 대군이 대패하고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하는, 고려가 정말 고전했던 전쟁이었지만 곳곳에서 뛰어난 무장들에 의한 반격이 있었지요.

 

여요2차 전쟁

 

이 과정에서 반란의 주역 김훈과 최질은 2차 전쟁당시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른 고위 무관들이며, 김훈은 강조의 대패 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김계부, 이원, 신녕한과 같이 거란군을 기습하여 거란군의 진군을 잠시 막은 인물입니다.

 

최질은 통주성에서 거란의 회유를 거부하고 사신을 억규한 뒤 끝까지 항전하여 이원구, 최탁, 채온겸,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던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2. 반란의 씨앗

강조의 반란으로 황위에 오른 현종은 거란과의 2차 전쟁이 끝난 후 또하나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3차 전쟁 전쟁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도중에 김훈과 최질의 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반란은 160년 후에 일어난 유명한 무신정변(이의방,정중부 등)과 매우 비슷한 이유로 발생하게 됩니다. 

 

2차 거란과의 전쟁 후 전 국토가 황폐해진 상황에서 전후 복구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는 와중, 전시과(관료들에게 지급하는 녹봉)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2차 전쟁이 끝난 후 전공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 최질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와중에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을 메꾸려고 했던 것에 반발하여 결국 이것이 반란의 트리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고려 영업전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문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전시과(녹봉, 월급)으로 돌려막기 해버리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 때문입니다. 이 욕먹을 짓을 한 문신들이 바로 황보유의와 장연우인 것입니다. 전쟁 당시 목슴을 걸고 싸웠던 무신들은 졸지에 자기의 월급이 문신들을 위해 돌려지게 된 것이지요. 정말 황당한 사건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짓거리를 벌였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중앙군(관군)들의 장교 및 병사들의 살길이 막막해 진 것이지요. 

 

이런 조치는 현종 재위 초기 1년차의 일로 반란 4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무인들은 과거제도가 없었고, 호족들의 사병 또는 지방에서 힘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이 무관으로 뽑혔기에 문신들과의 괴리가 있었고 무인들이 무시받던 시대입니다. 주요 전쟁에서도 최고 사령관은 무조건 문신들이 맡았지요. 우리가 장군으로 알고 있었던 강감찬도 무인이 아니고 문신입니다. 이런 세태가 무인과 문신과의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었고, 훗날 1170년부터의 이의방에 의한 무신 정권이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무신정변


3. 반란의 시작

2차 전쟁이 끝난 2년 후, 고려가 입조 및 강동 6주의 반환을 하지 않자 무력으로 강동6주를 차지하겠다고 공식발표하였으며 이 때부터 작은 국지전이 끝없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무신들의 밥줄을 뺏는 삽질을 하고 나서도 이를 묵과하고 무려 4년동안 사태를 방치하고 맙니다. 

 

황보유의 장연우

 

불만이 쌓여있던 무신들은 1014년(현종 5년) 11월 1일(음력) 상장군 김훈과 최질등이 여러 위군을 이끌고 난을 일으키게 되며, 이 일의 원흉인 중추원사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유배보냅니다. 이 두명의 상장군 외에도 박성, 이협, 이상, 이섬, 석방현, 최가정, 공문, 임맹 등이 가담하게되며 여러 위의 군사들을 꾀어내어 북을 치면서 궁궐로 진입하여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곧바로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포박하고 매질하여 초죽음상태로 만들었고 왕을 협박하게 됩니다. 현종은 이런 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반란군의 요청에 따라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유배보내게 됩니다.

 

 

현종을 협박할 때 "황보유의 등이 우리들의 영업전을 점탈하였으니 사실상 자신들의 이익을 꾀한 일이지 특별히 조정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발가락을 잘라서 신발에 맞춘다면 몸체는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분노와 원한을 이기지 못하니 요청하옵건대 나라를 좀먹는 자를 제거하셔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소서"라고 간언합니다.

 

이 영업전을 뺏는 조치는 당연히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것이지요. 

 

조정을 장악한 김훈과 최질은 현종에게 무관들의 문관벼슬을 겸하게 해달라 요청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당연히 빼앗겼던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하여 관철시키게 됩니다. 이 덕분에 어사대와 삼사를 각각 금오대와 도정서로 바꿔버리면서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됩니다. 


4. 진압된 정변

정변이 있은지 4달 후 현종은 전 화주방어사였던 이자림의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에 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을 모두 서경의 장락궁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게 됩니다. 겉으로는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였지만 이는 이자림의 계책이었습니다. 이자림은 일찍이 서경의 민심을 얻고 있는 자였기에 현종은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으로 임명하고 은밀히 서경에서 무신들을 습격할 준비를 하게됩니다. 

 

 

무신들이 술에 취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자림이 준비시킨 병력이 들이닥칩니다. 이 자리에서 반란의 주동자 김훈과 최질 및 이협, 최가정 등 19명을 모두 제거 합니다. 곧이어 김훈 등의 아들 및 친형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후에 통상적 사면에서 제외시켰으며, 그들의 부모,처, 누이 등으로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석방 됩니다.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 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관대한 처벌이지요. 

 

무신정변

 

19명을 제외한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면서 이 알려지지 않은 반란은 끝이 나게 됩니다. 겨우 4개월만에 끝나게 되지요. 후에 고려 중후반기에 있었던 무신집권 100년과 비교하면 허무하고 싱겁게 끝나게 됩니다. 허무하게 끝나서인지 다른 유명한 사건에 비해 주목을 적게 받는 사건입니다. 

 

 

이후 현종은 무관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는 한편,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리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무신들의 분노를 본 현종과 문신들은 이들의 불만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반대 없이 이일은 차질없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훗날 의종때 이 때의 교훈을 잊어버리고 무인들을 무시한 결과 무신정변이 다시 일어나게 되지요. 

 

거란의 2차 침입 이후 소규모의 국지전은 계속 일어났지만, 이 무신정변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상장군을 포함한 19명의 지휘관급 장수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거란은 다시금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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