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적 기병을 막아라! 검차의 기원과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검차들

cky0214 2023. 11. 2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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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개발되기까지, 아니 총이 개발되고 나서도 꽤 긴 기간동안 기병은 보병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근대 초반까지도 전투에서의 기병은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병과였지요. 그 옛날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몽골족이나 아시아 북방계열 민족들이 발흥의 원인 중 제일 중요했던 것은 기병을 통한 기동전이었습니다.

 

기병의 무서움

 

기동전의 속도 뿐 아니라 전투에서의 기병은 보병이 상대했을 때, 의외로 높이가 높고 위협적이지요. 기병 10기가 보병 100기를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을만큼 전투력의 차이는 극심합니다. 따라서 산악지형이나 좁은 계곡 등의 지대가 아니라면 기병이 강한 쪽이 승기를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이던 고대 및 중세의 국가들은 기병 키우는데 소홀함이 없었고, 동시에 상대 기병을 막기 위한 전술 및 무기 개발에도 노력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이번 post에서 살펴볼 검차입니다.

 

검차

 

귀주대첩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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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차


1. 검차의 기원

검차는 전투마차(戰鬪馬車,war wagon) 혹은 흔히 전차의 한 종류입니다. 고대 로마시대의 전차처럼 수레와 같은 형태이지만, 돌격을 위한 공격적인 무기인 전차와는 반대로 아군을 보호하고 보조하는 방어적인 성격이 강하지요. 

 

고대 전차

 

그러나 위 그림과 같은 돌격용 전차는 이미 기원전이 끝나기도 전에 기병에게 전투의 주도권 자리를 내주고 도태되고 맙니다. 이런 전차들은 간혹 돌격용으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돌격보다는 아군의 진지 주변을 둘러쳐서 임시 방벽으로 만드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상대 기병의 돌격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어 보병의 대 기병 전략으로 사용되었지요. 이런 바리케이트용 방벽으로 쓰였던 전차가 후에 검차 종류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전차는 일단 방어 전술이기 때문에 이미 적 기병에게 전투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어 있으며, 이런 수레를 사용하여 진형을 짜고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형의 자유로움, 민첩성을 도모하기가 힘들게 되지요. 또한 사각형의 방진을 구성하지 않으면 측면이 약할 수 있고, 한다 하여도 포위를 쉽게 당해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검차

 

하지만 지형을 잘 이용하고,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이 전차 혹은 검차의 단점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지요. 유럽에서 전차로 유명한 얀 지슈카는 작전상 후퇴와 전투지역을 탁월히 선택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삼국지의 제갈량 역시 전차나 수레를 이용하여 팔진도의 완성도를 올렸지요. 서진의 마륭 역시 공격적인 운용을 통해 승리를 가져온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고 대포와 총이 점점 발달하면서 대기병전술이었던 검차(전차)는 점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보병을 보호하고 엄폐물을 제공해준다는 이 전술적 개념은 계속 살아남아 현대의 전차로 계승되게 되지요. 현대의 전차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격을 위한 고대 전차와 방어를 위한 검차,전투마차의 결합이라 볼 수 있지요. 


2. 검차의 등장

중국 삼국시대에서 돌격 목적이 아닌 전차의 사용이 확인됩니다. 이전 춘추전국시대에서는 공격에 좀 더 주안점을 둔 전차가 많이 사용되었지요. 

 

진나라 전차

 

삼국시대 흉노족 및 기타 북방 유목민족들의 기병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우마차를 사용하여 임시 바리케이트로 방어진을 짜는 "거진"이 존재했는데, 이는 수레에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은 가시나무를 싣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재빨리 제일 앞줄에 수레를 배치하고 가시나무를 쏟아 임시 방어선을 만들어 수비합니다. 제갈량의 팔진도가 바로 이런 전투 마차를 이용한 전술이었지요. 

 

팔진도

 

진나라 마륭이 사용한 팔진도를 보면 "편상거"라는 수레를 이용해 적을 막았다고 합니다. 

 

편상거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채리엇이 사용되었고, 이후 방어를 위한 전차에 대한 기록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국의 전투수레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검차입니다. 아무래도 산이 많고 평야가 그리 많지 않은 한국의 지형 상 무거운 전투수레보다는 가벼운 산악수레에 검과 방패를 장착하는 검차의 형태가 주로 쓰였다고 하네요. 형태는 위에서 본 편상거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고려 검차

 

이 검차 종류는 중국 중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는데 이전과는 조금 모습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그냥 수레를 사용했다면 이때부터는 일반 수레와 달리 전면부에 큰 방패판을 세우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창검을 달아 적의 돌입을 저지하거나 성벽,성문이 파손되었을 때 임시 방책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또한 공성전을 할 때 적의 활을 막아내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게 되지요.

 

 

고려시대에 사용된 위 그림에서의 검차가 바로 이런 종류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화차도 방패와 창칼을 달아서 화포와는 별도로 일반상태에서도 검차와 유사한 용도로 쓰이기도 하게됩니다.

 

조선 문종화차

 

아래그림은 중국 송나라 항전차의 모습인데, 고려의 검차와 비교하면 좀 더 가볍고 작은 형태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상차(코끼리 모양)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항전차와 상차

 

고려시대 검차의 형태라 생각되는 아래 그림은 서산 해미읍성에 전시되어 있는 검차입니다. 

 

고려 검차

 

서산 놀러가시는 분들은 한 번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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