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역사속으로 사라진 북방민족, 한 때 북방의 패자 거란족 역사

cky0214 2023. 11. 30.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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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 북방의 대 제국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그들의 위세는 서쪽으로는 몽골초원, 동쪽으로는 연해주 끝, 남쪽으로는 송나라 북부 연운 16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1125년) 당하기까지 약 200년동안 동북아시아의 패자로서 군림하게 되지요.

 

거란족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26년간 전쟁을 치루면서 우리민족과도 접점이 많은 이 거란족. 이번 post에서는 거란족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요나라 소배압 장군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거란 요나라의 맹장이자 영웅, 백전 노장 소배압 장군

귀주대첩에서 고려군에게 대패하게 되는 거란의 장수 소배압, 우리에게는 단순히 요나라 장수에 불과하지만 거란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단순히 전쟁에서만이 아니고 정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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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


1. 거란족의 유래

거란족의 기원은 흉노 및 동호의 한 분파로 추정됩니다. 흉노족은 여러 북방민족의 연합체였으며 기원전 3세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며, 이 흉노족 연합체가 후에 선비족, 오환족 등으로 분리됩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동호계 선비족인 우문선비(우문가문, 후에 북주를 세움)의 한 분파로서 우문부와, 고막해(庫莫奚,해족, 요하강 근처에 거주)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거란족 거주위치(6세기 말경)

 

몽고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현재는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거란"이라는 종족명은 모용선비인 모용연에 의해 격파된 선비족이 우문선비, 해, 거란으로 나뉘어 송막 지방으로 피신한 4세기 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주변의 약탈과 방어의 필요성이 있을 때만 뭉쳤을 뿐 절대적 군주에 의해 한 나라를 이루지 못하는 연합체에 가까운 형태로 살고 있었지요. 그러나 자신들을 "키탄(Qitan)"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느슨한 형태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경 중후반까지 거란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5호16국중 하나)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전연이 중심지를 용성(요서지방 요녕시)에서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됩니다. 388년 고막해가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후에 화북통일)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독립하게 됩니다. 

 

한국사 속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거란이 처음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기록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8년(서기 378년)가을,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킨 기록이 있으며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중흥을 꾀하다

그 뒤 거란은 고8부(古八部,8개의 부족연합) 시대에 나름대로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항상 주변국에 의해 그 세력이 더이상 크지 못하였지요. 중국의 왕조는 물론, 고구려, 막북(탁발선비 및 몽골)같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의 신세밖에 안되었습니다.

 

거란족

 

이러한 상황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당나라의 지배였습니다. 돌궐의 철륵부에 의한 내부 반란을 틈타 628년에 거란 8부의 수령들이 모두 부족을 이끌고 당에 투항한 것이지요. 당은 이들을 10주()로 나눈뒤 마회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8부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때 거란의 지배 세력인 대하(大賀)씨가 당나라에 귀부하여 국성인 이씨를 하사받았습니다. 이 시기를 대하씨 8부시대라 부릅니다. 이 때부터 거란의 내부 결속력은 강화되기 시작합니다.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거란에 대한 당의 간섭이 심해지는 듯 했으나 696년 이진충이 독립하여 거란국을 세우게 되나 얼마안가 이진충은 죽고 손만영이 왕이 되지만 돌궐의 카프칸 카간의 도움을 받은 당나라 측천무후에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당을 벗어나 돌궐의 영향권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됩니다. 

 

이진충 손만영

 

독립이 실패하면서 발해, 당, 돌궐 사이에서 제대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당나라 내부의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면서 위구르족 역시 이런 주변 강국으로서 거란에 압박을 가하게 되지요. 이는 10세기초 당의 멸망과 5대 10국시대를 지나 거란족의 영웅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까지 계속됩니다. 


3. 통합을 이루다

당나라에 귀부하고 대하씨(이씨 성 하사받은)가 도독의 지위를 독점하는데 이 8부시대는 730년 이소고가 피살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730년 이후로는 10세기초까지 요련씨(遙輦氏)가 최고지위를 차지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칸을 칭하기도 하였으며 서서히 그 지위를 강화시키면서 민족을 결집시키게 됩니다. 

 

야율아보기

 

그러나 907년 요련씨의 칸 독점을 타파하고 칸이 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년~926년)가 거란족을 대통합하게 됩니다. 그는 종래의 8부족 연합체를 붕괴시키고, 정복국가 군주에게 필요한 전제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칸 등극전 병마권을 장악하고 해, 실위, 우궐 등 주변의 유목부족은 물론 여진인과 한인 등 정주민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많은 수의 부족을 송막 지방으로 이주시킵니다. 또한 변경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거란 영내로 도망오기도 하였으며, 이들 정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한 성곽은 아보기의 경제적 근거지가 됩니다. 

 

 

 

 

 

 

야율아보기는 자신의 군사,경제를 바탕으로 907년 드디어 칸에 즉위합니다. 즉위 후 911년,912년,913년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질랄부의 부족민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반발을 받았으나, 곧 8부대인을 연회로 초대하여 모두 죽인 후 916년 요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천황제라 칭하게 되지요. 


4. 대제국으로의 성장

주변의 해족,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하서회골, 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만주,연해주의 최대강국 발해까지 멸망시킨 요나라는 건국이후에도 거란(키타이)이란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됩니다. 

 

요나라

 

몽고를 포함한 북방지역을 모두 정리한 요나라는 중국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중국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 시기에, 후당(5대의 나라 중 하나)의 군벌 하동절도사였던 석경당이 숙청당할 위기에 처하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거란에게 원군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거란에게 북방의 16주를 할양하는 조건을 내걸게 됩니다. 거란으로서는 땡큐였지요. 이 연운16주는 중국 화북지역의 잇몸과 같은 역할입니다. 모두 만리장성과 산해관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지요. 

 

연운16주

 

이 지역은 만리장성의 보호를 받는 지역임과 동시에 북방의 유목민족을 막아내는 최전선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이곳 남쪽은 쭉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북방민족으로서는 기병으로 순식간에 전 중화지방으로 진출 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지요. 중국입장으로서는 스스로 대문을 열어준 꼴입니다. 이후 400년 동안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기 전까지 이 연운16주는 찾지 못하지요.  

 

 

또한 이 연운16주는 이미 개발이 수백년 동안 진행된 도시들로 인구만 수백만에 농업생산력 및 산업기반이 탄탄한 곳입니다. 결국 거란의 5만 군사의 지원속에 석경당은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건국하면서 이 연운 16주를 거란에 할양합니다(936년). 요나라는 이 연운16주를 얻음과 동시에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북방의 유목민족으로서 수렵과 목축에만 의존했던 요나라는 이곳을 기반으로 국력을 크게 성장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0세기 후반 요동 및 만주 연해주 일대의 발해 부흥운동까지 제압하며 명실공히 동아시아 북부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5. 전연의 맹약

1004년 거란 성종(야율융서)은 송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송나라와 전연(현 허난성 푸양시)에서 전연의 맹약을 맺어 송나라를 굴복시키며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우뚝 서게 되지요. 

 

발해의 부흥운동을 제압한 거란은 여진도 제압하고 서쪽으로는 몽골, 서역의 세력들, 강족들까지 제압하고 993년에는 1차 여요 전쟁으로 고려와 사대관계를 맺으며 중국 송나라를 제외한 동아시아 전체를 복속시킵니다. 이어 중국의 송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1004년 성종은 그 유명한 모후인 승천태후 소작과 함께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합니다.

 

거란 소태후

 

거란은 초기에 승세를 잡아 하북을 빠르게 점령해나갔고 송의 수도인 개봉에 가까운 전주까지 진출합니다. 그러나 전주에서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함락하지 못하는 일이 지속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거란 지휘관 소달름이 정찰중에 전사하게 되고 요나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지요.  이때 새롭게 지휘관으로 발탁되는 인물이 우리가 잘아는 귀주대첩의 패장인 소배압입니다.

 

 

전황은 교착되었고 후방의 송군이 집결하여 포위되는 위험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거란 입장에서는 퇴로가 끊겨 전멸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고 송 입장에서도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눈치여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적당히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전선이 교착상태에서 양국은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고 수차례 교섭이 진행됩니다.

 

전연의 맹약

 

이리하여 전연의 맹약을 맺게 되는데 주요 내용은 송나라가 거란에게 매년 30만의 세폐(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를 제공하고 형제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국경서은 현재 상태로 유지한다의 조건입니다. 형제관계는 양국 황제의 나이에 따라 형과 동생을 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전연의 맹약으로 송나라는 돈으로 평화를 샀으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송 입장에서는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고 전쟁으로 인한 비용보다 훨씬 저렴했으니 어느정도 타산이 맞은 것이지요. 거란 입장에서도 이 세폐를 기반으로 제국의 국력을 더욱더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5. 쇠퇴와 멸망

요나라 성종 시절 고려와의 3차례 전쟁에서 소득없이 막대한 자금만 소비한 요나라는 전쟁 후부터 성장동력을 상실하였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100년동안 큰 전쟁없이 고려,거란, 송 3국의 평화아닌 평화속에 만주와 연해주의 크지 않은 부족이었던 여진족의 통합이 시작됩니다.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와 억압으로 분개한 여진족이 완안아골타 아래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1115년 완안아골타가 최초의 통일국가인 금나를 건국하게 됩니다. 

 

금나라

 

여진족 완안아골타는 요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1121년 결국 거란은 여진의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게 됩니다. 완안아골타는 송나라에 러브콜을 보내 힘을 합쳐 요나라를 쓰러트릴 것을 제안하게 되고 송나라도 요나라에 대한 증오가 커 협조하게 되지요(해상의 맹약). 1121년 북송,금 연합군의 협공을 받자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야율연희) 서쪽으로 도망쳤으나 1125년 응주에서 금의 장수 낙색에게 붙잡혀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이때 요는 멸망하고 맙니다. 

 

 

이 때 금의 영향권 하에서 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야율대석을 중심으로 서요(카라 키타이)를 건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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