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시는바와 같이 병자호란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가 머리를 조아린 사건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636년에 일어난 이 전란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판도는 크게 요동치게 되지요.
이 전쟁에서 홍타이지는 직도 전략으로 중간 거점을 취하지 않고 바로 한양을 접수해버립니다. 이는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에서 거란이 취한 전략이기도 하지요. 이때 인조와 조선조정은 청군의 빠른 진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피난의 시간조차 벌지 못해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란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합니다. 청의 홍타이지는 조선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신의 관계만을 맺은 채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는데요, 양국 군사력차이가 이처럼 확실한데 왜 조선의 국토를 전부 접수하지않고 물러났던 것일까요?
이번 post에서는 병자호란에서 청의 행보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병자호란의 의문점
1. 청의 국력
전광석화과 같이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홍타이지는 군신의 관계를 확인하고 철수합니다. 당시 군사력이라면 조선 전 국토를 병합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지요.
청은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인조를 끌고가거나 폐위시키고 청의 황족을 왕으로 세워 보다 직접적으로 조선을 통치할 수 있었지요. 원나라가 고려에게 했듯이 말이죠. 그런데 청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과 명의 연결을 차단했고 후방의 위험을 없애는 정도에서 원정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청나라의 당시 국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청나라는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았고 만주와 요동지방을 점령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조선 침공당시 이전 거란이나 원나라에 비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서역을 먼저 정벌한 몽골이나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의 경제력을 장악했던 요나라에 비해 아직 장기전을 수행할 형편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조를 교체해버릴 목적으로 온 침공이라면 방어선을 하나씩 점령하여 장기전을 해야하는데, 청나라는 아직 장기전을 할 여력이 없어 지휘부(왕, 조정) 생포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단기전을 했던 것이지요.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격속도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침공 당시 수나라의 30만 별동대(살수대첩)이나 고려 침공 때의 거란 소배압(귀주대첩)도 왕을 목표로 직도 전략을 취했지만 청나라처럼 극단적으로 후방을 무시하고 남하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즉 청은 장기전을 극도로 경계했고 빠르게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청나라의 내부 사정상, 후방을 남겨둬서라도 빠르고 도박적으로 한양을 점령해야 했고 마침 조선은 내부 반란과 무능으로 운 좋게 큰 피해 없이 빠르게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즉 청나라는 병자호란 당시 전투력이 막강했음에도 조선을 전부 점령할 수 있는 장기전은 부담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선에서 전쟁을 빨리 끝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설령 전투력만 믿고 조선 전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경우 청도 엄청난 국력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후유증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들이 진정 목표로 했던 명나라 정벌은 꿈도 못꿨을 겁니다.
인조가 이점을 간파하고, 전쟁 초기 빠르게 몽진하여 군사를 재 정비 및 반격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 모릅니다. 전쟁을 장기화 시켰다면 임진왜란과 같이 각지의 의병 및 군 재정비를 통해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습니다. 조정내의 멍청한 대립과 우유부단한 인조의 대응으로 조선은 역대 최고의 굴욕을 겪게 된 것이지요. 이쯤되면 선조가 오히려 똑똑해보이기까지 합니다.
2. 천연두 대유행?
1637년 1월 11일 청황제 홍타이지가 평안 병사 유림에게 보낸 조서에서 자신이 직접 한양에 머물고 군대를 나누어 조선전체에 주둔시킬 것이라 전합니다. 이를 통해 청은 조선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진의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 조서와는 다르게 인조의 항복만을 받아낸 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급하게 퇴각하고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이 원인으로 앞서 예기한 경제력, 국력이 아직 충분치 않고 명나라와의 계속된 전쟁을 앞두고 있을 것이라 어느정도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당시 본국에 보낸 조서를 보면 강화도 함락을 위해 수군을 준비시킨 점 및 상황상 남한산성의 실제 농성전 기간보다 훨씬 길게 포위를 풀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청 태종실록 연구에서(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홍타이지 자신이 직접 병자호란 때 피두선귀(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했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청 태종실록 1637년 8월24일).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조선의 천연두 유행이었던 것이지요. 만약 천연두가 아니었다면 남한산성은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인조가 남한산성이 아니라 방어가 용이한 강화도에서라도 항전했다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가 결과가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물론 청군의 진격속도가 빨라 어쩔 수 없이 남한 산성을 택하긴 했지만 여기서라도 농성을 효율적으로 하여 장기전으로 이끌었다면 임진왜란 및 멀게는 거란의 침입때 처럼 적 후방을 끊임없이 괴롭혀 전쟁양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1번에서 언급한 청나라 내부의 국력과 천연두를 고려하면, 만약 인조가 선조, 고려 현종처럼 전쟁초기에 몽진을 하여 전쟁을 장기화 했었더라면 분명 삼전도의 굴욕같은 일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인조가 조금만 잘 대처했더라면, 조정의 목소리를 잘 정리하고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으며 백성의 고단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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