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궁정동 안가에선 총성이 울립니다. 김재규 중정부장 및 경호원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등 6명을 암살하는 10.26 사태가 발생한 것이지요. 공민왕 시해 사건 이후 600년만에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사건이지요.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완전히 붕괴하고 새로운 희망이 싹트이게 됩니다(물론 대머리 아저씨가 망치게 되지만..).
이 사건의 주인공 김재규의 이후 미흡한 대처로 인해 이후 전두환의 12.12의 빌미를 주고 맙니다만, 길었던 독재 체제를 끝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그런데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암살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지요.
이번 post에서는 10.26의 원인을 둘러싼 여러가지 배후설과 음모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10.26의 배후, 음모설
1. 김재규 본인의 민주화 열망?
재판과정에서 김재규 본인이 주장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 첫번째입니다. 10.26 사태후 체포된 김재규가 재판과정에서 했던 증언으로 독재와 유신정권에 염증을 느꼈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부마항쟁(부산마산)이 일어날 때 이를 조사하러 내려갔다가 민중들의 저항을 두 눈으로 보고, 독재를 끝내야 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지요.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임을 국민에게 약속하라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유세 시에 국민에게 약속했었구요. 그러나 박정희가 이를 선거 후 무시하고 유신 헌법이 선포되었고 이를 본 김재규는 부하들 앞에서 박정희가 다 망쳤다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속내를 예기했다고 합니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당시 3군단 연대작전 오순춘은 김재규 군단장이 실제 박정희를 연금하려 모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지요.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김재규와 대화를 하면서 박정희를 환자에까지 비유하기도 했다고 하며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에 청와대에 들어와 박정희에게 유신 체제를 바꾸는 조언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재규가 정말 재판 당시 외쳤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일을 벌였는지 아니면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이었는지 본인이 아니면 알수가 없고, 아직까지도 설왕설래 말이 많습니다. 평소 그의 집에 "자유 민주","대의"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해서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그가 유신 마지막 시절까지 한 자리 차지하였고 유신이 이루어지기까지 역할도 많이 했기 때문에 의심이 가는 점도 많긴 합니다.
2. 차지철과의 2인자 싸움?
다른 모든 음모론과 배후설보다 이 가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갈등이 10.26의 원인이라는 설이지요. 이 둘을 둘러싼 인물들의 증언도 있었고, 10.26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에서도 둘 간의 경쟁과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저 있는 것을 보면 제일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설입니다. 전 국무총리 김종필씨도 10.26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김재규는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았던 차지철에게 면박과 무시를 자주 받아왔고 이것이 원인일 것이라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많았습니다. 김재규 교사시절 제자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방송에서 둘 사이의 관계나 갈등을 회고록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부하 또는 기관끼리 2인자 경쟁을 시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 간에 갈등과 견제가 심했지요.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지만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올라서고 박정희의 신임을 얻자 자연스레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마항쟁의 해결방안을 놓고 벌인 설전에서의 갈등도 심했지요. 김재규는 온건적인 대응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300만 학살을 대놓고 예기하면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었고, 박정희도 차지철을 감싸는 듯한 언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무렵 차지철계로 분류되고 있었던 김치열 법무부 장관이 차기 중정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부마항쟁에 대한 미흡한 대처에 대해 김재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대하는 일이 잦아지자 차지철에게 밀릴 것이라 생각하여 사태를 벌였다는 것이지요.
3. 미국의 공작이다?
유신헌법 공표 이후 박정희와 당시 미 대통령 카터와의 관계는 좋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관계속에 미국 CIA의 공작으로 김재규를 사주해서 암살을 했다는 설이 있지요. 특히 이 시기 군과 관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당시 고위층 인사들 중에서 박정희가 암살되면 이후 어떻게 될지에 대해 미 대사관, 주한미군, CIA 관계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 암살의 이유 중 하나로 든것이 한미동맹의 악화이기도 했지요.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지미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한국에 들어온 CIA 250명은 10.26사태까지 한국에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남재희 전 장관은, 지미카터 후보 시절 대선캠프 내에 리처드 홀브록이 뉴욕타임즈 기고문에서 박정희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었고 이후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로 임명되지요. 이 인물은 암살 이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 체제에 많이 관여했다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미국 내의 반 박정희 운동, 코리아 게이트 , CIA청와대 도청사건, 핵개발 계획 등 미국과 갈등을 빚어왔으며, 마침 이때 훌브룩의 기고문이 일본 세계주보에 실리면서 미국 사주설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전 글라이스틴 주한대사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를 어느정도 수긍하고 있습니다. 직접 개입은 안했으나 암시의 형태, 간접적 사인(윙크 등)으로 김재규를 사주하여 일을 벌이게 했다는 것이지요. 김재규는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 및 CIA 서울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를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또한 소련에서도 암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했었다고 합니다.
4. 충동적인 암살?
2번에서 언급한 차지철과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던 때에 연회장에서 우발적으로 일으켰다는 설이다. 이는 김재규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한 설입니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박정희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차지철에게 권력의 힘을 몰아주는 형태가 되며, 다른 측근들이 불만이 쌓여 갔었고 차지철을 경계하라는 충언도 무시했던 것이 쌓여 사건 당일 우발적으로 폭발했다는 설이지요.
이 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그의 사건 직후 행보입니다. 거사 직후 자신의 본거지였던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가는 어이없는 실책을 하고 마는 것이지요. 사전에 미리 치밀하게 계획했다면 육본이 아닌 중정에서 사후처리를 했을 것이고,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란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육본을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인데 단순히 이를 두고 계획적이 아니라 여기는 것도 좀 무리가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군을 제대로 장악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5. 김형욱의 죽음 이후 불안감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자리는 당시 박정희 정권하에서, 온갖 더럽고 힘든일을 했던 자리였으며 정권의 권력순위 최상단에 위치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역대 정보부장의 말로가 보여주듯 토사쿠팽의 자리였고 결국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나락으로 가는 자리였습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등이 모두 그러했으며, 특히 김형욱의 최후는 더더욱 그러했지요.
김형욱은 정보부장에서 쫓겨난뒤 박정희에게 앙심을 품고, 코리아 게이트의 실체를 폭로했는데 이때 김재규의 지시로 김형욱은 납치돼 암살당하게 됩니다. 10.26이 발생하기 불과 몇 주전 10월초에 이런일이 있었으니 김재규로서는 자신 역시 이러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을 것이고 회의를 느껴 사태를 벌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더더욱 청문회 증인으로서 미국의 보호를 받던 김형욱이 암살된 사실은 김재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6. 김영삼을 지지했다?
암살 당시 제 1야당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지지한 것이 그 이유라는 설입니다. 김영삼과 김재규는 김녕 김씨 종친이어서 야당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친밀감이 있었고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지지했기 때문에 암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황상 김영삼을 많이 만났던 것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황상인 것이지 증거가 거의 없는 주장이므로 그냥 이럴수도 있구나하고 넘겨버릴 정도입니다.
7. 장준하와의 약속?
평소 장준하와 일정정도 친분이 있었고 이에 따라 장준하와의 약속,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사후 김재규가 유족들을 알뜰히 챙겼으며, 장준하 사망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고 하네요.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추대하고 국회 1/3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는 김지하가 주장한 내용인데, 믿거나 말거나죠.
8. 최태민 박근혜
김재규가 옥중에서 항소했을 때 그 항소이유서에서 아래와 같이 예기합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 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 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박광현 안전국장을 시켜 조사를 하게 한 뒤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위시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이를 조사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하였으나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재규는 사안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최태민을 처벌해야 한다고 재차 건의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는 최태민을 직접불러 김재규와 같이 심문을 시작합니다. 이때 박근혜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며 눈물로 호소했고, 박정희는 박근혜의 태도만 보고 최태민을 처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김재규를 강하게 질책해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차지철 역시 최태민과 박근혜를 감싸고 돌았고, 이때부터 김재규보다는 차지철을 더 신임했다고 하지요. 이렇게 이쁨을 받은 차지철은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까지 막았고, 김재원은 비서실장인 김계원을 만나러 오는 것처럼 하여 간신히 청와대를 출입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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