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차지철의 이미지는 한결 같았습니다. 키가 작지만 덩치가 있고, 말하는 것이 거침없으면서 무대뽀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지요. 단순하면서 과격하고 어떤면에서는 무식하게 일처리를 하는 인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리가 알아왔던 것과는 다른면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보통 김재규와 차지철을 비교할 때 김재규는 엘리트에 깔끔한 성격, 차지철을 단순, 무식, 과격의 상징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그의 행동들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에 대해 알아보고 10.26이 발생한 원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post를 작성해봅니다.
차지철
1. 서자출신 & 효자
차지철은 1934년 11월 6일 생으로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김대안씨, 1898~1998.12.23)는 주막에서 일하시던 분이며, 첫 남편은 지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이후 재혼으로 차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여 차지철을 낳게 됩니다. 서자로 태어난 것이지요.
당연히 이복 형제들에게 엄청난 설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어머니만이 그에겐 위안이 되는 분이었죠. 이래서인지 그는 효심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고 그 형제들이 찾아왔지만 이를 내치면서 다시찾아오면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얼씬도 하지말라라고 하며 문앞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말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는데, 노태우 회고록에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여름 박정희의 휴가에 차지철, 노태우와 동행했는데, 박정희가 차지철에게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합니다. 박정희가 계속 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는데 바로 기겁하여 나가게 되지요.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차지철은 박정희를 거의 신처럼 받들었지만, 그런 박정희의 말보다 어머니 보다는 후순위였던 것이지요.
또한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 그대로 돌아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 일 이후 차지철은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차지철이 출세하고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지요.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줬다고도 합니다. 이러다보니 어머니 김대안 씨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어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라며 아들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지철 사후, 여러 사기와 주변인들로 인해 어머니 김대안씨는 고생을 했고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만 100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2. 그의 부인들
초선의원 시절 결혼한 첫 번째 결혼은 얼마되지 않아 이혼을 맞게 됩니다. 차지철이나 그 주변인들이 이 이혼은 여자의 복잡한 남성문제 및 시어머니 부양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두번째 부인은 피아노 연주자라고 알려저 있고, 이 사이에서 딸 3명을 두었습니다. 이들은 차지철 사망 후 전두환의 주선으로 미국 이민을 떠나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3명의 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고 알려졌으며, 차지철이 빼돌린 재산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네요. 이후 이 자녀들은 국가 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으나 미국국적이라는 이유로 패소하게 됩니다.
3. 의외의 학창시절과 군경력
명문 용산고 재학 시절 그는 의외로 엄청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친구로 알려진 분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별로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으며 싸움을 하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분 인터뷰에서 차지철의 10.26가담이 이해가 안되었다는 예기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죠. 또한 지금 널리 알려진 무식한 이미지와는 달리, 출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독기를 품었고 공부를 꽤 잘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군 생활 이후 무술 실력이 상당했는데 태권도,합기도 각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가졌다고 하지요
외모가 그래서 그렇지 실제 그의 성격은 깔끔했다고 합니다. 전역 이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구두, 머리 스타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용산고 졸업 후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사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제 12기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육군 포병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포병 장교가 됩니다. 19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았고 1960년 국비로 미국에 유학을 떠나 미육군 기지인 조지아주 포트베닝 레인저스쿨에 입교합니다. 여기서 인종차별을 한 교육생을 두들겨 팼는데 덩치가 훨씬 큰 상대를 때려눕힌 무술실력을 높이 사 태권도를 시연해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했다고 하네요.
이후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때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쿠데타에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공수특전단 시절 박치옥 소장(구데타 가담) 밑에 있었는데 구데타 시 박치옥이 차지철을 박정희의 경호로 차출시켜주게 되면서 박정희와 만나게 됩니다.
위 유명한 사진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이 있지요. 이 사진은 차지철의 대표적인 모습인데요, 이 때 사실 차지철은 박정희의 경호부대일 뿐 구데타 주역에 낄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위 사진처럼 투샷으로 찍힐 만한 짬이 안되었던 것이지요. 당시 구데타의 혁명 위원장 장도영과 박정희의 사진을 찍으려던 기자가 박정희가 실세인 것을 알고 장도영을 제외하고 박정희를 찍으려고 한 사진에 우연찮게 차지철이 찍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진은 이후 차지철의 이미지를 굳히는 사진이 되고 말지요.
4. 정치를 시작하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이 되고 1962년 박정희가 집권하자 소령진급, 2달 뒤 5월31일에 중령으로 특진하게 되고, 3달뒤인 8월21일 예편되었습니다. 1963년 제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됩니다. 1964년에는 국학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압하고 이후 한양대에서 2년만에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차지철은 국회의원시절 권오석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기도 했으며 막말을 자주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죽하면 김두한한테까지 까불었을까요? 그의 무식하고 단순한 이미지는 이 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베트남 파병 때 의외로 박정희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데요. 차지철이 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쇼였지요. 미국이 요청한대로 반대 없이 참전을 한다면 얻어내는 것이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박정희가 차지철에게 지시를 한 것이었죠. 단순히 연막작전을 펼친 것이었지만, 이 일을 하면서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짜 반대론자가 되어 버립니다. 박정희에게 좀 혼나기는 했지요.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파병을 하게 되고, 미국으로부터 군 현대화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 일로 박정희의 총애를 더더욱 받게 됩니다.
이후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이떄 국회 외무위원장직도 수행하게 되지요. 1971년 8대 국회의원에도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 내무위원장직을 역임합니다. 1973년 제 9대 선거에서는 광주군/이천군/여주군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됩니다.
5. 도를 넘는 행동들
1974년 광복절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를 대신해 경호실장이 됩니다. 죽은 육영수 여사가 차지철을 추천했다고 하지요. 여자관계가 깨끗하고 술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권력 중심부와 제일 밀접한 인물이 되지요.
그런데 이렇게 최고의 자리에 오른 차지철은 이때부터 막나가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어렸을 때부터의 억압된 관계, 상황과 맞물리는 점이 있는데요. 출생 자체가 서자였던 점, 형제로부터 억압받은 유년기,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육사 출신이 아니었던 점 등이 계속 그를 마음속 깊이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즉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위 그림에서도 저 사진에서 차지철만 육사 출신이 아닙니다.
특히 육사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자격지심을 해소하기 위한 월권행위들을 하게됩니다. 경호실장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가서도 육사 출신이 아닌 것에 대한 자격지심을 행동으로 표출하였지요.
육사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했는데, 경호실장 시절 육사 출신 현역 중장,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으며 항상 경호실 훈련 때 마치 총사령관마냥 군복을 입고 아예 수경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들과 월권행위들로 인해 주변 인물, 특히 김재규와의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왔고 10.26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또한 박정희도 이런 차지철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되는데 원래 차관급이었던 경호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했으며 비상시에는 경호실장이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개정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둘다 경호실 차장보 출신이기도 했지요. 나이도 어리고 일개 예비역 포병 중령인 민간인 차지철은 한국전 참전 용사 장군인 육군 선배 장교들에게 매일 거수경례까지 받게 됩니다.
1978년 이후 점점 더 엉뚱한 행동을 하게되는데요,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만들어 박정희를 초대하기 까지합니다. 또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경호원가를 만들어 전 경호실 인원이 따라부르게 만듭니다. 또한 매주 월요일 아침 경복궁 연병장에서 국기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진행했습니다. 여기에는 민주공화당 중진과 장관들 같은 거물들이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바뀐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를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보고서와 결제서류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며 모두 경호실을 거쳐가도록 했으며, 중앙정보부와도 갈등을 빚습니다. 차지철은 별도로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으며 중정부장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나이도 어리면서 김재규에게 항상 김부장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이외에도 여러차례 정치개입을 했으며, 최태민을 옹호하며 김재규와 자주 갈등을 빚게됩니다.
6. 10.26으로 최후를 맞다
부마항쟁을 눈으로 보고온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의 발언을 듣게 됩니다. 박정희는 4.19때 곽영주나 최인규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했지만, 자신이 직접 발표하면 대통령인 자신을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며 사태가 심각하면 직접 발포하겠다고 합니다. 차지철은 여기에 덧붙여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부산,마산 시민 100만~200만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느냐?"라은 미친 발언까지 합니다.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다는 말까지 하지요.
결국 지금까지의 월권행위와 이런 발언들로 인해 10.26이 터지게 되고 그는 김재규의 총에 사망합니다. 10.26이후 사건의 진실이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 차지철이 박정희를 암살한 것으로 생각하는 군인과 정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평소 차지철의 행동은 도를 넘고 있었지요.
차지철은 결국 김재규에 의해 제거되고 맙니다. 그의 나이 45살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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