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동아시아 판세를 바꾼 여요3차 전쟁, 지도로 보는 귀주대첩

cky0214 2023. 11. 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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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 한국사 3대 대첩(살수,한산,귀주) 중 하나이며 11세기 동아시아 정세를 크게 바꿔놓은 크나큰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단순히 고려가 거란을 물리친 전쟁이 아닌 당시 송, 요, 고려라는 삼국의 동아시아 판세를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건이지요.

 

귀주대첩

 

1010년 거란 성종 40만 대군의 2차 침입은 고려 현종의 입조와 1차 침입당시 고려에 귀속되었던 강동6주의 반환을 조건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고려가 2가지 조건을 계속 거부하자 거란은 힘으로 강동6주를 차지하겠다며 1014년부터 최북방 흥화진 및 통주 인근을 끊임없이 공격하였지만 고려는 이를 모두 막아내었죠. 

 

이에 1018년 거란은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켜 다시 고려를 침공하게 됩니다. 여요3차(고려-거란 3차 전쟁)이 발발한 것이지요. 귀주대첩은 이 3차 전쟁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전투이자 고려의 대승으로 끝난 대첩입니다.

 

이번 post에서는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강조정변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인가, 강조정변의 진실

고려시대 주요 2대 정변은 초기 강조정변과 후기 무신정변입니다. 이 중 고려 초기 강조정변은 황제가 폐위되고 시해되었던 사건이며, 이로 인해 거란(요나라) 2차 침공의 표면적인 명분으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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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전쟁의 냄세

2. 개전 초기상황

3. 개경을 사수하라

4. 귀주대첩의 시작

5. 귀주대첩의 끝


 

귀주대첩


1. 전쟁의 냄세

고려-거란2차 전쟁 후 강화의 조건이었던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 반환이 모두 지지부진하자 다시 군사력을 동원하기로 합니다. 대군을 동원한 3차 전쟁은 1018년 말부터 진행되었지만, 2차 전쟁이 끝난 3년 후인 1014년 부터 국경을 조금씩 건들기 시작하지요. 거란의 성종은 1014년 6월 장수 소적렬을 시켜 압록강 인근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재 침략을 준비한 것이지요.

 

 

또한 장수 이송무를 파견하여 강동6주의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구함과 동시에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1014년 10월 고려의 통주와 최북방의 흥화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흥화진 장군 정신용의 방어로 거란군 7000명이 죽는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후 3개월동안 재정비 후 흥화진을 포위하고 통주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합니다. 양규장군의 1차 흥화진 전투에 이은 2차 흥화진 전투였지요(이후에도 흥화진은 한번도 함락되지 않았음).

 

흥화진 통주

 

거란의 계속적인 강동6주의 반환요구에도 고려는 응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최북방의 흥화진 성 하나 제대로 못빼았는 거란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가 없지요. 심지어 반환요구를 위해 파견된 사신까지 체포하고 억류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죠. 이에 화가난 거란은 1015년 9월 재차 칩입하여 통주를 공격하였으나 수성에 갈고 닦아진 고려군을 넘기가 힘들었습니다. 통주를 pass하여 우회하여 청천강까지 진격했지만 영주(안북부)를 공격했으나 여기서도 실패합니다. 

 

 

이어 1016년 7월에는 야율세량이 곽주를 공격하여 고려군 수만명이 사살되는 침략이 있었지만 더 진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듬해 1017년 5월에도 침략이 이어져 거란 소합탁이 다시 침공, 흥화진을 포위하고 9일동안이나 공격했으나 흥화진을 점령하는데 실패하고 다시 돌아갑니다(제3차 흥화진 전투). 흥화진은 현재 평북 의주 위원면 일대입니다. 

 

흥화진
흥화진 실제위치

 

거듭된 전투에서의 패배로 거란은 깨닫습니다. 깨작 전투로는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드디어 1018년 10월 요성종은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합니다. 거란의 명장 동평군왕 소배압을 도통으로, 정예 기병 10만을 선발하여 본격적인 고려 침공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에 맞서 고려도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에,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안주에 고려군 본진을 설치한 뒤 무려 20만 8천 300명을 주둔시키게 됩니다. 

 

1만

 

강조의 30만 병력, 3차 전쟁에서 준비한 20만 병력이 얼마나 엄청난 병력인지는 위 1만명의 그림을 보면 상상이 가시나요? 위 그림이 20개가 있어야 합니다. 고려라는 작은 나라에서 20만을 준비했다는 건, 전국민 동원령을 내렸다는 예기입니다(당시 인구 추정 300~400만). 나라의 운명을 건 총력전이었습니다. 

 


2. 개전 초기상황

거란 소배압 10만 대군이 침략을 개시하자, 고려군 상원수 강감찬은 12,000명의 기병을 흥화진 옆 삼교천 계곡에 매복시켰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성에서 수성했을 것이나, 거란군의 편제상 대부분 기병이고 기존의 전투 방식대로 중간기지를 만들지 않고 개경으로 진격전을 펼칠 것을 예상했고 이에 흥화진을 지나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을 펼친 것이지요. 

 

흥화진 삼교천전투

 

강감찬의 예상대로 거란은 전초기지인 내원성을 출발하여 흥화진으로 가지 않고 우회하여 삼교천을 도하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삼교천을 막은 둑을 터뜨림과 동시에 기병을 출격시켜 혼란에 빠진 거란군에 1차적으로 타격을 입히게 됩니다(4차 흥화진 전투). 귀주대첩에서는 수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첫 전투인 흥화진 삼교천 전투에서 수공으로 적을 혼란시키게 되지요. 

 

 

이때 사용된 수공은 정말 댐처럼 높은 둑을 쌓아두고 터뜨린 것이 아닌 무릎정도의 물을 흘려보내 적의 전열을 흐뜨릴 목적으로, 물로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예기고, 진열이 흐뜨러진 적을 물리칠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흥화진 삼교천전투

 

큰 피해를 입은 거란 소배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간의 주요 성들을 처다보지도 않고 그냥 개경으로 달립니다. 유목민족의 특성이지요. 보급로건 뭐건 필요한 식량은 현지 조달한다는 생각으로, 퇴각로 걱정은 뒤로하고 오직 수도 개경과 현종만을 목적으로 내달립니다. 

 

소배압 진격로

 

이에 맞서 강감찬은 개경까지의 길에 주둔해있는 별동대를 계속 보내 거란군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유격전술을 펼치게 됩니다. 또한 부원사 강민첨을 자주(慈州)에 급파하여, 거란군이 마탄으로 향하도록 하고 시랑 조원으로 하여금 마탄에서 진을 쳐 거란군과 싸우게 합니다. 자주로 급파된  강민첨은 내구산 전투에서, 또한 서경(평양) 근처 마탄진에서 시랑 조원 역시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마탄진 전투에서는 거란군 1만이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거란 소배압의 본대는 빨랐습니다. 선발대의 방향과는 다르게 산길을 따라 개경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지요. 이 소식에 동북면 병사 3300명이 개경으로 급하게 이동하였으며, 강감찬 역시 김종현에게 기병 1만명을 주어 거란 본대를 맹추격하게 됩니다. 


3. 개경을 사수하라

개전초기부터 고려의 강한 저항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배압은 이전 2차 전쟁에서와 같이 수도 개경만 점령하면 끝날 것이란 생각으로 개경으로 순식간에 접근합니다. 결국 개경 근처 신은현(新恩縣)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역사에서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오지요. 특히 유목민족의 경우에 사례가 많습니다.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이런 직도 전략에 결국 무릎을 꿇었던 역사가 있지요. 

 

거란군 개경접근

 

아무튼  김종현의 1만 기병 추격대를 따돌리고 신은현에 도착한 거란군은 개경을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이 신은현은 개경과 거리가 100리(40km)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코앞에 있는 마을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고려 현종은 2차 전쟁에서 몽진의 기억과, 교훈을 배웠는지 개경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현종은 성밖의 백성들을 전부 개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청야작전을 펼친 후 적을 기다리게 되지요.

 

 

현종은 2차 전쟁 후 개경 방어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습니다. 개경의 성문, 성벽을 보강하고 청야작전으로 개경 주변에서는 쌀 한톨 구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거란군의 보급을 사전에 차단하였지요. 이런 개경의 모습을 본 소배압은 쉽사리 공격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소배압은 한 가지 꾀를 내게 되는데요, 철수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몰래 척후병 300명을 개경에 잠입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던 고려군에게 들키게되고 개경근처 금교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100명의 고려 기병에게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금교역 전투).

 

개경 진입이 불가하자 소배압으로서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개경을 목표로 직도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후방의 퇴각길이 위험하였고 청야전술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고립될 위험을 느끼고 결국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1019년 2월). 

 

거란 퇴각로

 

퇴각길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서경(평양) 근처를 크게 우회하여 퇴각하게 되는데 연주 및 위주근처에서 별동대에게 500명이 사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으며 퇴각하게 되고, 거란 국경을 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귀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4. 귀주대첩의 시작

여러 지방에서 고려군에게 손실을 입은 소배압의 퇴각군은 귀주(龜州, 현재 평안북도 구성시)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상원수 강감찬은 1019년 2월 거란군이 귀주를 통과하게 되자 병력을 이끌고 귀주 동쪽 교외에서 거란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이때 개경으로 거란군을 쫒았던 정예기병 1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지요. 

 

귀주

 

드디어 1019년 2월 1일, 거란군은 퇴각길의 마지막 전투를 예상하고 귀주벌판에서 대회전은 준비하며 포진을 시작합니다. 이때 귀주성 앞쪽으로는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구릉지대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 이 하천을 건너는 사이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도감 야율팔가가 배수진을 치자 주장하였고 소배압도 대회전에는 자신이 있었는지 그 말에 따라 하천을 뒤로 두고 싸우게 됩니다(대회전이란 벌판에서 본진끼리의 정면 대결을 뜻함).

 

귀주 대회전

 

배수진은 나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기병위주의 거란군으로서는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먼저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후방이 강으로 막혀 있어 대회전중 우회 침투를 허용할 위험이 없는 포진이었던 셈이지요. 밀리지 않는 이상 후방의 하천은 하나의 성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만큼 평야에서의 전투는 자신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란군의 배수진

 

강건너의 고려군을 상대할 바엔 오히려 먼저 강을 건너 퇴로가 없는 하천을 뒤로 두더라도 넓은 평야에서 기병을 통해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포진이라 할 수 있겠지요. 

 

 

드디어 귀주 벌판에서 양측의 대 혈투가 시작됩니다. 고려에서는 거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검차를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검차

 


5. 귀주대첩의 끝

드디어 귀주 벌판에서의 대혈투가 시작되고 양측의 끊임없는 공방전이 지속되었습니다. 검차를 동원한 고려와 이를 뚫으려는 거란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살과 피가 튀는 대 혈투가 벌어집니다.

 

귀주 전투

 

 

그런데 별안간 개경을 향해 거란을 쫓았던 김종현의 1만 정예기병이 거란군 뒤쪽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강감찬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다른이유로 늦게 도착한 것인지는 확실 치 않습니다. 배수의 진을 치고 고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거란군은 상당히 놀라게 됩니다. 

 

김종현의 등장

 

마치 반지의 제왕 로한의 기마대가 펠렌노르 전투에 등장했던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이 1만의 기마대는 그야말로 거란의 후미에서부터 맹렬히 공격해 들어가 거란군의 진열을 헤집어 놓게 됩니다. 대회전의 특성상 진형이 한 번 무너지면 겉잡을 수가 없지요. 

 

반지의 제왕 로한기마대

 

또한 비바람도 고려군을 돕게 되는데, 북쪽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남풍으로 바뀜과 동시에 소나기까지 내리게 됩니다. 벌판에서의 비바람, 그리고 2월달의 추운 날씨를 감안하면 남풍일 경우 북쪽에서 고려군을 맞이해야 했던 거란군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진형은 더더욱 무너져 배수진을 친 상태라 수습 불가의 상태로 퇴각을 시작하게 됩니다. 퇴각이라 말 할 수도 없겠지요. 각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부원사 강민첨의 고려군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盤嶺) 벌판으로 몰아 넣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전투는 포위 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어갑니다. 고대의 전쟁에 있어 포위 섬멸전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것이 보통인데, 거란군 10만 명중 살아 돌아간이가 겨우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소배압은 간신히 목슴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지만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 4명이 죽을 정도로 고위 계층 장수의 손실도 컸습니다.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승중의 대승이었죠.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거란 요나라를 크게 이긴 이 싸움이 바로 귀주대첩이며,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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