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대기만성 원리원칙 주의자, 탄생설화도 있는 강감찬, 구국의 영웅이 되다

cky0214 2023. 11. 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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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균형을 가져옴과 동시에 고려를 구해낸 영웅 강감찬. 그는 국난을 극복한 구국의 영웅이자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한국사 3대 대첩(살수/한산/귀주) 중 하나인 귀주대첩을 이끈 명장으로도 칭송받고 있습니다. 고려시대하면 강감찬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지요.

 

강감찬

 

강감찬 하면 "강감찬 장군"이라는 용어가 떠오릅니다. 당시 북방 최강국 요나라(거란)을 물리치고, 전장을 누빈 장군이긴 하나 실제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시랑을 거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입니다. 귀주대첩당시 상원수라는 군의 지휘하는 직을 수행하였지만 특수한 상황에서의 임시적인 군단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문관이 군을 지휘한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고려 구국의 영웅 강감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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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탄생설화가 있다고?

2. 대기만성, 늦게 빛을 보다

3. 나라를 구하다

4. 죽기 직전까지 출근하다

5. 강감찬에 대한 평가


 

 

강감찬(姜邯贊)


1. 탄생설화가 있다고?

강감찬은 고려 초기 948년 12월 27일 금주 낙성대(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태생으로 본래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입니다. 강감찬이라는 이름은 과거 급제 이후 개명한 이름이지요. 

 

강감찬

 

 

강감찬 장군은 진주 강씨 집안이며,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 수나라와의 1차 전쟁 당시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던 그 유명한 강이식 장군입니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 당시 개국공신(삼한벽상공신)이었던 강궁진(姜弓珍)입니다. 고려 개국 당시 경주에서 살다가 금천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강이식장군

 

강감찬에게는 탄생 설화가 있습니다.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또한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위대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귀가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강감찬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요 여기서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별 중 4번째 별로서 재물과 문(학식)을 관장하느 별입니다. 여기서 태어난 상가의 이름이 붙는데 그것이 현재 지하철역 중 하나인 낙성대입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낙성대는 고려 수도 개경에 있었습니다.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좀 이상합니다. 이런 탄생설화는 개국을 한 주인공, 예를 들어 박혁거세나 고주몽 처럼 나라를 새로 연 인물들에게나 있을 법 한데, 강감찬은 왕도 아니고 신하일진데 탄생설화가 있다니요? 또한 현재 무속인들 중에 강감찬 장군을 모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강감찬 생가터 유허비(낙성대)

 

이는 그만큼 강감찬이 민중에게 사랑받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태조도 왕도 아닌 신하였지만 30년간 이어진 전쟁을 끝낸 구국의 영웅, 죽을 때까지 권력에 취한 모습이 아닌 백성을 사랑하고 항상 겸손과 원리 원칙을 중요시 했던 인물, 그가 바로 강감찬입니다. 


2. 대기만성, 늦게 빛을 보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강감찬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놀랄만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추가로 유년시절의 그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온바는 없습니다. 

 

고려 성종 2년인 983년 문과에 36살의 나이라는 늦은나이에 장권급제하게 되는데 그의 인생 후반기 활약에 비해서는 관직생활이 엄청 늦은 편이었습니다. 32살에 무과에 급제한 성웅 이순신 장군님도 그러하셨죠. 그런데 장원 급제한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바는 없습니다. 

 

 

다만 조선시대 야사(동국여지승람등) 에서 그 행적이 조금 나오는데,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했으며, 여기서 강감찬은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고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요. 

 

그 후 1009년 강조 정변으로 대량원군 왕순이 즉위한 뒤 출세를 하게 되는데(예부시랑), 1010년(현종 1년) 여요2차 전쟁 당시 거란의 40만군으로 고려를 침공하자 당시 조정 대세였던 항복론을 반대하고 홀로 왕의 몽진을 주장하게 됩니다. 현종도 그 의견에 따라 머나먼 몽진에 나서게 되지요. 

 

여요 2차 전쟁

 

이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요나라 황제 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합니다. 그 조건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6주의 반환이었는데, 거란군은 추운겨울과 양규장군등의 활약으로 보급로 및 퇴각로 차단을 우려해 조건을 수락하고 퇴각하게 됩니다.

 

 

2차 여요 전쟁 후, 공을 인정받아 1011년 중추사에 올랐다가 바로 이부상서로 승진하였으며 현종 9년인 1018년에는 서경(평양)유수와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가 됩니다. 강조정변이 있기 전까지(~61세) 중앙정부 어떠한 자리도 없이 전국을 떠돌며 관리직을 하던 그가 10년만에 최고관직인 문하시중 바로 다음가는 자리까지 오르게 된것이지요. 사망하기 전에는 최고 위치인 문하시중까지 오릅니다. 참 사람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3. 나라를 구하다

왕을 제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문화시중까지 오른 강감찬, 환갑을 넘어서야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야말로 대기만성의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그를 이렇게까지 올려놓은 사건, 다들 아시는 귀주 대첩입니다.

 

1019년(현종10년) 거란의 3번째 침공이 일어나고, 이를 대비하고 있던 현종은 강감찬을 서북면행영도통사에서 고려군 총사령관인 상원수에 임명하고 거란을 막게 합니다. 철저하게 침공을 대비하고 있던 고려는 전초기지인 흥화진부터(삼교천전투) 무난하고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지요. 그야말로 기선을 제압하게 됩니다.

 

 

거란 소배압의 직도작전(개경 직진)을 대비해 청야전술, 유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개경함락에 실패하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앞 벌판에서 포위 섬멸함으로써 그야말로 개 박살을 내버립니다. 

 

귀주대첩

 

전쟁 직후 개경으로 돌아오는 강감찬을 현종은 극진히 대접합니다. 금꽃을 꽂아주고 한손에는 술잔을 한손은 강감찬을 붙잡고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의 예를 표하게 됩니다. 강감찬은 구국의 영웅으로서 대중들의 큰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현종 강감찬

 

이 전공으로 결국 왕 이외의 최고 다음 위치에 있는 문하시중에 임명됩니다. 

 


4. 죽기 직전까지 출근하다

거란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1020년(현종 11년) 강감찬은 이미 74세였습니다.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로 추측되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종은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지요. 그러나 현종은 그를 계속해서 가까이 두고 싶었는지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한 번만 출근토록 명합니다. 

 

이토록 아낌을 받은 강감찬은 1031년 이름도 긴 직위, 작위, 공신호인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신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 개국후( 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 開國侯)"에 봉해짐으로써 최고의 명예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1031년 8월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현종이 붕어하고 3개월 뒤의 일입니다. 그는 죽기전 3개월 전까지 출근했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 내사령 유진의 전례를 따라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주었고, 현종의 묘정에 베향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습니다. 

 

저서도 있는데,"낙도교거집" "구선집"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5. 강감찬에 대한 평가

"고려사"에서는 강감찬에 대해서,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외모는 장군이라 불릴만한 체구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자 백성들이 모두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고 칭송하였지요. 또한 그는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인물이 또 있을까요. 이런 성품과 인품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다른 권신들과는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말년까지 평온하게 보냈으며 사후에도 나라를 위한 영웅으로 칭송받습니다. 

 

낙성대 기마상

 

그의 대표적인 성과, 귀주대첩 이후 고려, 거란, 송 3나라는 거란이 금나라(여진족)에 의해 멸망할때까지 평화를 유지하였으며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강자로써 12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현종때부터 인종때까지 고려는 그 이전 나라 및 이후의 세대를 통틀어 가장 빛나던 전성기글 구가합니다. 벽란도가 세계적인 교역 항구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때 입니다.

 

 

서울시 관악구(고려 당시 금주)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 인헌 중학교, 인헌 고등학교가 있으며, 어렸을 적 이름이었던 "강은천"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습니다. 2008년 행정동명이 변경되면서 강감찬의 시호와 초명, 출생지를 본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지요.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습니다. 마을버스 이름도 은천운수, 인헌운수이며 이곳에서는 매월 10월 강감찬 축제가 벌어집니다. 

 

강감찬 축제, 은천초등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 5번함인 DDH-979는 장군의 함자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고,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지요. 

 

강감찬함 인헌무공훈장

 

무속신앙에서는 여러 명장들과 함께 군웅신으로 모셔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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