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에서 고려군에게 대패하게 되는 거란의 장수 소배압, 우리에게는 단순히 요나라 장수에 불과하지만 거란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단순히 전쟁에서만이 아니고 정치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중국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우며, 이후 고위 관직에 올라 거란 조정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지요.
이번 post에서는 강조를 대패시켰지만 훗날 고려에게 크게 패하는 거란 요나라 장수 소배압 장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그의 인생 최대 라이벌, 강감찬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소배압(蕭排押)
1. 소배압의 출신
소배압(蕭排押, 출생년 미상~1023년 사망) 또는 소파아이(蕭巴雅爾)라 불리우며 요나라의 군인 및 정치가로 거란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입니다. 자는 한은(韓隠)이며 이름인 배압은 거란어로 바야르(Bayar)로 읽는데 바야르는 몽골계어 쪽에서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제3차 고려 전쟁에서 참패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요사(거란기록)에는 군 용병술, 정치력 등이 뛰어난 문무겸비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송군을 상당히 고전시킨 공포의 장군으로 알려졌고, 고려와의 2차 전쟁에서는 강조의 30만을 박살내기도 했지요.
소배압은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의 비인 순흠왕후 술률평의 일족입니다. 술률 씨는 나중에 소(蕭)씨가 됩니다. 거란도 고려와 비슷하게 족내혼을 하는데요, 거란의 황제는 이 술률(후에 소씨 집안)집안과 중첩적으로 혼인을 하게됩니다. 야율씨와 소씨의 연맹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외척세력인 소배압 역시 족내혼을 하게되는데, 소배압의 장녀가 황제인 성종과 혼인을 하였고 소배압 그 자신은 위국공주(성종의 여동생)와 혼인합니다.
거란 황제 성종의 장인이자 매제가 되는 셈이지요. 참고로 소손녕은 월국공주(위국공주의 동생)와 혼인합니다.
소손녕은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서희의 담판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 소배압의 동생입니다.
그의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요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968년입니다. 그러나 여러 단서가 있는데요, 968년(거란 목종 18년) 목종과 주야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이나, 2015년에 발굴된 소배압의 장녀(거란 성종의 첫 비)의 무덤에서 장녀의 출생이 970년이라는 것을 봐서는 소배압의 출생은 950년 전후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019년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의 나이가 72살이었고 거란의 소배압도 약 70살이었으니 이 대첩은 모두 노장에 의한 전투였습니다.
2. 전공을 크게 세우다
요사에 따르면 소배압은 소부방의 후손으로, 기마와 궁술이 뛰어났고 야율문수노(야율융서)가 983년 거란의 성종으로 즉위했을 때 황제의 친위군인 피실군의 직책인 좌피실 상온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조복(몽골의 케레이트부로 추정됨)원정에서 큰 전공을 세워 성종의 이쁨을 받았고, 986년에는 송나라 조빈을 망과에서 크게 격파합니다. 이 공으로 승진길이 제대로 열렸으며, 야율사진과 함께 송나가 점령했던 산서지역의 영토를 탈환합니다. 그해 겨울에는 대 송 공격의 선봉장으로 남경 통군사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북송과의 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력을 쌓고 위국공주 야율가를 아내로 들여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군사적인 감각은 물론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났는데 995년에는 성종에게 정치의 이해나 부역법과 관련된 의견을 피력하는 등 정치, 외교 감각이 천재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사에 기록된 소배압의 초기 전공은 다음과 같습니다.
▶ 983년 좌피실군 상온으로 조복을 토벌하였다.
▶ 986년 송나라 장수 조빈과 미신의 군사를 망도에서 격파했다.
▶ 987년 8월 역주에서 송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 987년 10월 야율사진과 더불어 연산 지역의 함락되었던 고을들을 수복하였다
▶ 987년 11월 송나라 만성을 함락시켰다.
▶ 988년 8월 야율휴가와 소배압등이 역주로 가던 중 송나라 군대를 만나자 그 지휘장군을 죽이고 돌아왔다.
▶ 988년 10월 송나라 군대가 퇴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야율사진과 소배압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 989년 6월 야율휴가와 소배압이 태주에서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소배압은 무수한 전공을 세우며 거란에서 명장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당시 거란의 최고 지휘관은 야율휴가와 야율사진이었는데 소배압은 이 둘의 서열보다는 아래에 있었지요. 990년대 거란과 송의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소배압은 동경유수에 임명되어 제국의 동쪽을 총괄하게 됩니다.
1004년 거란의 승천황태루(거란 성종의 어머니)는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정벌합니다. 이 때 소배압은 발해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송의 덕청군을 함락시킵니다. 이후 거란의 본진은 남하하여 송나라 수도 개봉에서 100km떨어진 전주까지 점령하게 되지만 이 와중에 거란 총 사령관 소달름이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 소달름 후임으로 소배압이 총사령관에 임명되며, 군을 잘 추스려 결국 송나라와의 강화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전연의 맹"(매년 엄청난 조공)이지요. 이 후 소배압이 북부 재상으로 등극하여 송나라와의 국경일을 총괄하게 됩니다. 요사에는 소배압에 대해 "통치는 온후하고 관대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1010년 성종의 고려 2차 침입시 강조의 30만 고려대군을 통주에서 크게 패퇴시켰으며, 비록 고려 현종이 몽진하고 각지에서 괴롭힘을 받아 퇴각하기는 했지만 이때의 공이 인정되어 귀국 후 난릉군왕에 봉해졌습니다. 1013년에는 재상직을 겸직하면서 서남면초토사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1016년에는 다시 동평왕에 봉해졌습니다.
3. 단 한번의 패배로 몰락하다
1018년 성종은 소배압으로 하여금 10만의 군을 이끄는 도통에 임명하고 고려를 침공하게 합니다. 하지만 고려의 거센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귀주대첩에서 대패하게 되지요. 요 성종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던 소배압의 패전에 충격을 받았고 목슴만 겨우 건진채 돌아온 소배압에게 크게 화가 납니다.
말로는 죽이겠다고 욕설을 퍼부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지요. 어찌되었건 선제인 경종의 부마이자, 사적으로는 장인어른, 매제였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 크게 패하여 거란에게 큰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니 죽이지는 못했어도 원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모든 관직을 추탈하게 됩니다.
1023년 소배압은 빈왕에 봉해져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그해에 사망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거란의 한 장수, 귀주대첩에서 패배한 무능력한 장군으로 기억되지만 거란 요나라에서 그의 위치는 상당했습니다. 정치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영웅으로 칭송받았지요(귀주대첩 전까지는). 요사에서는 소배압을 아래와 같이 평가합니다.
"소배압의 정치는 너그럽고 넉넉했으며 결단을 잘했다. 모든 부족의 사람들이 소배압을 존경하며 사랑했다. 백성이 이로써 풍성하고 부유해졌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칭송했다."
소배압은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재상이었고, 전쟁터에서는 명장이었습니다. 또한 성품과 인품 역시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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