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반란의 씨앗을 뿌리다. 고려 장연우와 황보유의

cky0214 2023. 12. 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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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진 고려 1170년 무신반란 보다 170년 앞선 시대에 이미 무신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지요. 1011년 2차 여요전쟁이 끝난 후 김훈과 최질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무신과 문신과의 불신의 씨앗이 남게 되었고 이것이 쌓이고 쌓여 후대의 무신 정권을 탄생시킨 시초라고 보기도 합니다.

 

장연우와 황보유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이름있는 지휘관들이 모두 처형되었고 이로인해 거란이 고려를 노리게 되는 기회가 됩니다. 이기긴 했지만 이는 3차 여요전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무신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던 고려 장연우와 황보유의에 대해 알아봅니다. 

 

 

또 하나의 무신정변 김훈과 최질의 반란, 고려를 전쟁으로 빠트리다

김훈과 최질은 1010년 고려의 2차 전쟁 당시 강조의 30만 대군이 거란에 패하고 난 후, 거란의 진격을 막고 피해를 입힌 공으로 상장군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자리에 무장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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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유의, 장연우


1. 최질 김훈의 난

현종 재위 시절 김훈과 최질 등의 무신들이 문신들의 정책에 맞서 일으킨 반란으로 1014년 음력11월부터 1015년 3월까지 4개월간 지속된 반란입니다. 

 

김훈과 최질은 2차 여요전쟁때 공을 세우고 상장군이 되는데, 김훈은 강조가 통주전투에서 패한 후 완항령에서 거란군을 기습하여 거란군의 진격을 늦춘 적이 있고, 최질은 통주에서 항전을 하여 끝까지 통주성을 지켜낸 인물입니다.

 

무인시대 무신정권

 

전쟁이후 최질은 공을 세웠으나 높은 문관직에 오르지 못하자 불만이 쌓여갔었지요. 이때 중추원에서 일하던 문신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어처구니 없는 짓을 벌입니다. 전쟁 후 재정이 어려워졌던 조정은, 당시 고려의 중앙군이었던 경군의 영업전을 문신들의 전시과(녹봉, 월급)로 돌리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해버립니다. 이를 문신들이 주도하구요.

 

 

목슴을 걸고 싸웠으나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군 및 장수들의 불만은 서서히 쌓여갑니다. 이 불만은 4년동안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하는데, 1014년 음력 11월 군사의 사기도 떨어지고 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화가난 김훈과 최질은 결국 무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김훈과 최질

 

영업전을 빼앗는 짓을 벌인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 정권을 세우게 되지요.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원복과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구, 관철시킵니다. 

 

결국 4개월 후 현종에게 제압당하지만 무신과 문신과의 갈등은 서서히 커져만 갑니다.

 


2. 황보유의

황보유의(皇甫兪義, ? ~1042년)의 본관은 황주(黃州)이며 고려 왕실의 외척인 훈신 가문 출신입니다. 또한 공신의 후손이며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 고려에 공을 세운 분들이지요. 후삼국시대에 태조 왕건을 보필하여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고,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낸 패서지방의 호족 황보제공 집안으로 추정됩니다.

 

황보유의

 

고려 제 7대 왕 목종 시절 선휘판관에 오르고 목종 12년(1009년)에 1월 채충순과 최항의 추천으로 목종은 훗날 현종이 될 대량원군을 삼각산 신혈사에서 모셔오도록 명을 내리게 됩니다. 

 

황보유의는 왕의 측근으로써 목종을 보좌하고 그의 편이었습니다. 채충순 및 최충은 황보유의가 종묘사직을 보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마땅히 나라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노력할 사람이라 생각하여 목종에게 그를 대량원군을 맞이할 사람으로 천거합니다. 명을 받은 황보유의는 문연과 별장 10명만을 데리고 삼각사로 재빠르게 달려가 대량원군을 모셔오게 됩니다.

 

 

1009년 2월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모시고 왔을 때 이미 강조정변이 완료되고 목종과 천추태후가 쫓겨난 후였습니다. 결국 목종은 폐위되었고 현종이 옹립되며 목종은 강조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현종이 즉위하자 황보유의는 전중시어사가 되었다가 이부시랑으로 승진하였고, 내사사인으로 고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중추원 일직원이 됩니다. 

 

황보유의

 

1010년(현종1년) 11월 판관으로 통주 전투에 참여하지만, 강조가 대패하며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합니다.

 

황보유의가 중추원 일직으로 있었을 때 2차 여요전쟁이 발발했는데, 전시에 들어가자 군비가 증액되었고 관리들이 월급(녹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황보유의는 중추원사 장연우와 함께 경군(중앙군, 직업군인)의 영업전(녹봉)에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할 것을 현종에게 제안하였고 현종이 이를 수락하면서 급한 사정을 정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업전을 빼앗긴 무관들은 당연히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이 제도가 시행된지 4년 후 상장군 최질과 김훈이 1014년 11월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의 원인인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했고 제명한 뒤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황보유의

 

고려말 학자인 이제현이 쓴 글에서는 황보유의는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과 화친 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추원 일직으로 녹봉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녹봉이 줄어드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무신들의 녹봉을 빼앗아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니, 당연히 무신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귀양가고 2년 후 1016년 급사중으로 복귀했습니다. 1026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고, 현종 20년인 1029년 참지정사 왕가도, 상서좌복야 이응보, 상서좌승 황주량 등과 함께 개경에 방어를 위한 나성을 쌓았습니다. 현종이 승하하고 9대 덕종 원년인 1032년에 참지정사에 임명되었고 이부상서를 겸하게 됩니다. 정종 원년 인 1034년과 1035년에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정종3년인 1036년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은퇴한 황보유의는 1042년에 사망합니다.


3. 장연우

장연우는 현재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본관은 흥덕이며, 그의 부친은 장유입니다. 장유는 신라 말에 중국 남부의 오월로 피난갔다가 뒤에 귀국한 사람입니다. 광종 시절, 그의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 여러 차례 객성의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중국사신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장유를 시켜 그들을 대접하게 했다고 합니다. 

 

장연우

 

장연우는 행정 실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부시랑을 지냈고 1010년 2차 여요전쟁이 터지자 강조를 따라 통주에서 행영도통부사로 참전합니다.

 

 

강조가 패배하고 개경이 함락된 후 현종의 나주 몽진길에서 채충순, 지채문 등과 함께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합니다. 1011년 음력 1월 3일 하공진이 거란에게 철수 교섭을 하러 갔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갔지만 장연우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가을 음력 7월 2일에 채충순과 함께 중추사에 임명되었고, 음력 8월 9일에는 판어사대사가 되었으며, 황보유의,최사위와 함께 건의하여 동경유수를 없애고 경주방어사를 두게 합니다.

 

장연우

 

1014년 조정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정규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에 나누어주는 일을 건의했었고 이후 김훈,최질의 난이 발생하여 유배를 가게되었고 정기 사면에서도 제외됩니다. 난이 진압되자 복직되었고 1015년 6월 26일에는 호부상서가 되고 11월 23일 사망한 뒤에는 상서우복야로 추증됩니다. 

 

영업전을 뺏은 사건 때문인지, 그의 열전은 황보유의의 열전과 붙어있습니다. 고거전쟁 드라마에서도 둘은 붙어있지요.

 

 

생전에 문학에 소양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동문선"에서 그가 향찰로 전해지던 고려가요를 바탕으로 지은 한시 "한송정곡"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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