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시즈가타케 칠본창 축성의 달인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

cky0214 2023. 12. 2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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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는 임진왜란 발발 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고니시가 한양을 지나 황해도 지방으로 진격한 것과는 다르게 가토는 강원도, 함경도 지방으로 진격하여 잔인한 전투를 치룬 인물이지요.

 

가토 기요마사

 

전국시대부터 고니시와는 라이벌이자 원수같은 관계였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고니시와 척을 지게 되는 장수입니다.

 

이번 post에서는 가토 기요마사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가토 기요마사


1. 태생 , 도요토미와의 만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562년 대장장이 일을 하던 부친 가토 기요타다, 모친 이토(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 사이에서 1562년 음력 6월 24일에 태어납니다. 가토의 아명은 야사와카였으며 그의 나이 3살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지요. 

 

가토 기요마사

 

가토의 어머니 이토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친척인 카지야 고로스케의 집에서 지내게 되며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만나게 됩니다.

 

 

가토 기요마사와 히데요시는 복잡한 혈연으로 이루어지 있는데요, 본래 가토의 어머니인 이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의 사촌이었고 이토와 몸을 의탁한 카지야 고로스케의 부인은 카지야 세이베에의 양녀였기 때문에 카토에게는 이모가 되며, 그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인 네네는 자매사이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는 어린나이에 또래 중에서 매우 명석한 아이였고 기반이 없었던 그를 도요토미는 눈여겨 보게 되어 결국 후에 가신으로 삼게 됩니다.

 

도요토미 스스로가 미천한 출생으로 자라서인지 몰라도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2.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의 밑에서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여하여 적장을 죽인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의 공으로 3000석의 영지를 하사받았고 가토를 비롯한 큰 공을 세웠던 시동 출신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 불리게 됩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당시 칠본창이라 불리운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히라노 나가야스

카타기리 카츠모토

와키자가 야스하루

카스야 타케노리

 

평민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가토 및 기타 칠본창을 키워 자신의 후다이(대대로 주군을 섬기는 집안)로 삼으려는 생각이었지요. 이 때문에 가토는 영지를 추가로 계속 받게 됩니다. 

 

 

1585년 관백이 된 도요토미는 큐슈 정벌에 나서게 되고, 이때도 공을 세워 히고국의 절반을 받아 17만석의 다이묘가 됩니다. 이후 계속 영지가 늘어 25만석까지 받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그가 임명된 자리는 도요토미 직할지인 하리마, 이즈미의 대관(관리)직, 사누키의 임시 총독, 그리고 히고 다이묘직입니다. 

 

최근 연구 결과에서는 전투에서의 가토 역할은 많은 부분 후방 지원이었을 것이었다고 합니다. 즉 가토 기요마사의 초반 경력은 완전한 돌격 무장 보다는 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으며 내정관의 역할이었지요. 

 

가토가 전투에 참여 시 애용했던 무기는 "가타가마야리" 였고 평생 자신의 상징으로서 길다란 모양의 특이한 투구를 애용했는데 장신인 몸을 더 돋보이기 위해서 혹은 작은 키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어 커보이고자 그런 모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 갑옷


3. 임진왜란 선봉장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토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동시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침략합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를 부장으로 고니시와 합세하여 최전방에서 조선을 유린합니다.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와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그는 누가 먼저 한양을 접수하는지 경쟁하게 되는데, 고니시의 계략으로 한양 입성을 고니시가 먼저 하게 됩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 누가 먼저 한양에 들어갔는가 하는 부분은 교묘히 빼놓고 자신의 사자를 잽싸게 보내 공적을 위조하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정을 탄핵하게 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이시다 미츠나리와 척을 지게 됩니다. 전쟁 후 가토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는 단초가 되는 사건이었지요.

 

개성을 함락할 때까지는 고니시와 함께 전진하였고, 그 이후 갈라져 고니시는 황해도 지방으로, 가토는 함경도로 진격하게 됩니다.

 

가토 기요마사

 

함경도로 진격한 가토는 일본에 협력한 반역자, 순왜 국경인, 국세필등과 함께 선조의 서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았으며 이 공으로 국경인과 국세필에게 벼슬까지 내립니다. 

 

또한 여진족 약탈에 분노했던 조선인 약 2000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현재 중국 용정시에 있었던 여진족 노토 부락을 공격하여 성 하나를 점거합니다. 일본사 최초로 만주에 처들어간 사건이지요. 여진족의 발빠른 대처로 기병으로 포위를 시도하자 재빨리 다시 두만강을 건너 철수합니다. 이 일 이후 도요토미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명나라로 향하는 길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토는 점령지인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토를 호랑이 가토(虎加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대첩에서 대패하고, 명군의 참전, 함경도의 추운 날씨, 보급의 문제로 병력 중 9000명의 손실을 보자 남쪽으로 철군하게 됩니다. 서생포 인근으로 근거지를 옮긴 가토는 1593년 서생포 왜성을 완성하고 협상과정을 지켜보게 되며, 사신으로 온 사명대사와 회담을 할 때 "당신의 목이 조선 제일의 보배다"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기도 했다고 합니다.

 

북관대첩


4. 축성, 수성의 달인

1596년 도요토미에게서 본국 귀환 명령을 받고 돌아가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제 1군의 사령관으로 왜선 300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 침공합니다. 

 

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했는데, 화왕산성에서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에게 대패하여 현재의 울산시 학성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게 됩니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처절한 농성을 벌이게 되는데, 식수도 부족하고 식량도 없자 자군의 시체를 뜯어먹고 말의 피를 마시는 등 개고생을 하게 됩니다. 할복하기 직전까지 몰렸으나 결국 원군이 오게되어 간신히 살아남게 되지요.

 

울산왜성 전투

 

1598년 서생포 왜성이 명의 제독 마귀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군 전 병력을 일본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가토는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축성술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며, 울산에서 포로들을 엄청나게 끌고 갔는데 일본 구마모토 성을 지은 조선인 포로들이 바로 가토가 데려갔던 포로들입니다. 

 

 

구마모토성은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히는 견성인데, 임진왜란 종료 후 160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607년에 완공하게 됩니다. 울산왜성에서의 배고픔이 얼마나 지독한 기억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이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항상 도시락을 싸갔었고 성 내의 건물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이 가능하도록 토란 줄기를 넣고 짰으며, 성벽에는 조롱박을 기르도록 도배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하네요. 

 

구마모토성

 

이러한 특유의 건축으로 인해 에도 후기에는 "기요마사류"라는 이름까지 부여받으며 독자적 양식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5. 도요토미가를 배신하다

도요토미의 사후 일본으로 귀국하고, 권력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차지합니다. 그러나 가토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임진왜란 초반, 자신이 한양접수한 것처럼 보고 한 것을 이시다가 간파했고 탄핵을 당했기 때문이었지요. 둘 사이의 분란을 중재하던 마에다 토시이에까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를 죽이려 자택까지 처들어갔으나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주하면서 실패합니다.

 

이 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시다의 서군과 척을 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편에 서게 됩니다. 결국 도요토미가를 배신하고 도쿠가와에게 협력한 것이지요.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의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되고, 가토는 51만석의 대다이묘가 됩니다. 기존의 17만석에서 추가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24만석 및 기타 영지를 가증받은 결과입니다. 

 

가토는 새로운 영지를 부여받고 영지개발을 위해 하천공사에 힘을 쓰게 되며, 현재의 구마모토 평야는 가토의 개발의 결과입니다. 또한 일련정종 불교신자인 그는 영내의 일련종 사원을 건립하고 크리스트교, 다른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고시시가의 가신들을 많이 흡수하였고, 도요토미가를 배신하긴 했지만 도요토미 가문을 그래도 지키려고 노력은 합니다. 특히 자신의 영지였던 구마모토 성에 별실을 만들어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모시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구마모토에서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성까지 3일만에 갈 수 있는 바닷길을 정비하기도 했습니다. 


6. 생을 마감하다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리가 회견할 때 품에 단도를 숨기고 히데요리를 보호하고 무사히 회견을 마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가토는 이것으로 주군이었던 도요토미에 대한 은혜를 갚았다고 안심했다고 하지요. 이후 3개월 후,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6월 24일 구마모토 성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재통일 하고 에도막부를 열면서 가토의 가문은 서서히 몰락하게 됩니다. 에도막부 입장에서는 가토 기요마사는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이었고 이에야스에겐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는 1632년 막부 주도하의 2차 개역작업에 휘말려 영지를 몰수 당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의 자손들은 더이상 숙청당하지 않은 채 가문은 유지될 수 있었으며, 이후 메이지 유신때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현재도 그의 후손이 살아있습니다. 

 


7. 쾌지나 칭칭나네

북한의 통일신보에서 경상도의 대표적인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철수하는 왜군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 라고 한 환호에서 변형되었다고 한 것이지요.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서도 진주 지방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철수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 수록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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