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용인전투 대승, 미역으로 웰빙하라! 협판안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생애

cky0214 2023. 12. 2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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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그는 임진왜란 초기 크고 작은 전투에 모두 참여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수입니다.

 

용인전투에서 1600명으로 5만 조선군을 패퇴시켰으며, 한산도에서는 대패를 하여 미역으로 몇 일을 버티기도 했던 적이 있지요.

 

그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장수인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유력 다이묘가 아니어서 크게 이름을 남긴 인물은 아닙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이번 post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대해 알아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1. 전국시대 활약

와키자카는 1554년에 태어났으며 원래의 이름은 다무라 진나이입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와키자카 야스아키의 양자가 되며 와키자카 야스하루로 개명합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처음에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이었으나 1573년 아자이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멸문을 당하자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혼노지의 변 주동자)의 부장이 되어 단바 구로이성 공격에서 공을 세우게 됩니다. 

 

 

 

단바 공격 시 단바의 적귀로 명성을 떨친 아카이 나오마사에게 무용에 대한 상찬을 받았습니다. 또 그로부터 담비의 가죽으로 된 창집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후 아케치 마츠히데를 떠나 스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찾아가 가신이 됩니다. 히데요시 밑에서 주고쿠 평정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혼노지의 변 후에 히데요시의 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영지를 하사받습니다.

 

하리마국 미키성, 간키성 공략등에서 무공을 세웠고 1576년 150석을 봉록으로 받았지요. 1578년 미키성을 공략할 때, 히데요시로부터 백륜위 문장이 놓인 붉은 호로를 받았고, 이 문장은 와키자가 가문의 문장이 됩니다. 1582년 아카시군 30석을 가증받습니다. 

 

와키자카 가문

 

1583년 히데요시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활약했으며 이때의 활약으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명칭을 받습니다. 이 때 시바타 가쓰마사를 전사시키는 등의 활약으로 야마시로국의 영지 3000석을 얻게됩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세국, 이가국 지역에서 다키가와 가쓰토시의 이가 우에노성 등을 공격했고 1585년 5월 쎄쓰국 노세 군 1만석의 다이묘가 됩니다. 8월에는 야마토 다카토리 2만석, 10월에는 규슈의 아와지국 스모토 3만석을 받게 됩니다.

 

 


2. 수군을 지휘하다

와키자카는 1585년 이후 가토 요시아키와 쿠키 요시타가와 함께 수군을 이끌게 됩니다.

 

이때부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에서 수군으로 활약하게 되지요. 규슈정벌에서는 분고 우스키성의 오토모 소린 앞으로 군량미를 수송했으며, 구로다 요시타가 군에 편입되어 활약하였고, 사쓰마 히라사 성 공격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공격해 함락합니다.

 

호죠가의 오다와라성 공략전에는 수군을 이끌고 성을 봉쇄하는 활약을 했습니다.

 

1585년 부터 임진왜란까지 수군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와키자카가 원래 수군 장수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원래 해적 출신이었던 구키 요시타카를 제외한 다이묘들 중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해적이 있는 영지의 다이묘가 되며 전직을 한 경우가 있지요.

 


3. 임진왜란 활약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처음에는 해상수운과 수군관련 업무를 했지만, 이후에는 육군 전투에 참여합니다.

 

1592년 6월, 용인에 모인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을 1600명의 병력으로 야습을 진행해 패퇴시킵니다(용인전투). 그러나 전투 직후 의병장 원연에게 경기도 평택 진위면에서 패하였습니다.

 

용인 전투

 

같은 해 7월 이순신의 연전연승이 이어지고, 조선 수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수군에 편성됩니다.

 

그러나 영화 한산에서도 나왔듯이 전공을 탐하여 단독으로 출진하게 되고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대패하여, 이후 히데요시의 전술전환명령에 따라 수륙 방어 작전에 투입됩니다. 

 

한산도 대첩

 

한산해전에서 패배 후 당시 무인도였던 한산도에 도망치듯 상륙하여 탈출할 때까지 13일 동안 미역만 먹으면서 살아남습니다. 이 굴욕적 경험을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와키자카 가문은 자손 대대로 한산도 대첩날인 7월8일만 되면 식사를 미역만으로 때우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와키자카 미역

 

1593년 5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함락했으며, 정유재란 시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 참가하여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복권된 이순신에 의해 명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노량해전에서는 참여하지 않으며 이 전에 이미 다른 일본군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남원성 전투, 울산성 전투에 참전한 가토 기요마사의 구원군으로 공을 세웠고 이러한 활약으로 3천석이 가증되어 아와지국 스코토 번 3만 3천석의 다이묘가 됩니다.


4. 도쿠가와에 의탁하다

전쟁이 끝난 후 벌어진 세기카하라 전투에서 와키자카는 원래 서군이었습니다. 차남인 와키자카 야스모토에 병력을 주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려 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방해로 철회합니다.

 

이에 야스하루는 옛 친구인 야마오카 가게토모를 통해 사정을 이에야스에 고했고 양해를 얻게 됩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고 동군에 가담하려 했지만, 야스하루가 오사카에 머물 시점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였고 어쩔 수 없이 처음에는 서군에 가담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으로 배신하자 이를 기회로 생각하여 동군으로 배신하게 됩니다. 동군에 가담한 와키자카는 서군의 오타니 요시쓰구 군을 괴멸시키는 공을 세웁니다.

 

 

이 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사와 산성 공략에도 참전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함께 배신한 3명의 다이묘와 달리 전투 전 이미 이에야스에게 의탁한다는 의사표명을 했기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받지 않았습니다. 


5. 생의 마감, 이순신을 평가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전투에 참여한 후, 1609년 원래 본거지였던 아와지 스모토 번 대신 시코쿠의 이요 오즈 번 5만 3천석을 새 영지로 하사받습니다.

 

60세가 되던 1614년에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차남이자 적자인 와키자카 야스모토를 대신 보냅니다.

 

와키자카

 

1615년 차남인 야스모토에게 가문, 당주를 물려준 뒤 쿄토로 떠나 은거 생활을 했으며 1626년 음력 8월 6일 교토의 자택에서 72세로 사망합니다.

 

와키자카는 에도 막부가 열리고 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각 지역의 다이묘를 견제하려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세력 확장의 욕심을 버렸습니다. 이에 가문을 지킬 수 있었고 에도막부 내내 무사히 존속했으며 이후에도 처신을 잘하여 메이지 유신을 넘어 지금까지도 무사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회고록일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증오하고 미운데다가 두려운 자가 이순신이요, 가장 존경스럽고 같이 차 한잔 해보고 싶은 장수 또한 이순신이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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