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곱게 보내줄 순 없다. 조일 7년 전쟁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

cky0214 2023. 12. 10.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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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임진,정유재란을 일으킨 전쟁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지요. 7년간 전 국토와 백성을 유린한 일본군에 대한 울분과 복수심, 또한 이를 그대로 살려보냈다간 재침의 우려가 분명한 점 때문에 절대 쉽게 보내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노량해전

 

전세가 고착되고 일본의 수성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의 각 장수들은 최후의 탈출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명량에서 부활한 이순신과 명나라의 수군이 버티고 있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가 최후의 해전인 노량해전입니다.

 

이번 post에서는 노량해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병자호란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청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 병자호란의 의문점

다들 아시는바와 같이 병자호란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가 머리를 조아린 사건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636년에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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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1. 전쟁의 막바지

1598년 9월 18일, 음력으로는 8월 18일 일본 관백이자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합니다. 그간 명분도 없고, 명량 및 기타 전투로 전황이 불리해져 남해안 일대에서 수성전만 진행하던 다이묘들은 철수작전에 돌입합니다. 그러나 훗날 재침의 우려도 있었고 복수심에 불타는 조선군은 절대 쉽게 퇴각로를 열 생각이 없었습니다.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일본군의 철수 소식을 들은 조명 연합군은 남해안 일대에서 성을 쌓고 농성중인 왜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육로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략하기 시작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598년 10월 18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방어하는 사천왜성, 10월19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 10월21일 가토기요마사의 울산왜성을 공략했으나 왜군의 처절한 방어에 쉽사리 함락을 못하고 있었지요. 

 

일본왜성

 

이처럼 조명연합군은 사천성, 왜교성, 울산성에서 육로를 통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큰 이득을 보지 못하였고 전선은 교착화됩니다. 이에 1598년 10월 28일 이순신과 명나라군 사이에 새로운 작전이 논의 됩니다. "그들을 몰아 세워 소굴을 벗어나면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살해하면 가장 기묘한 책략", "먼저 왜교를 치고 나중에 남해를 도모" 등의 작전이 오고갔으며 한 달 뒤 이 계획을 실현하게 됩니다. 


2. 고니시의 고육지책

왜성에 대한 공세가 지속되고 있던 1598년 12월 초,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 수군 진린제독에게 퇴각길은 몰라도 사천왜성까지의 연락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뇌물을 보내게 됩니다. 순천왜성이 포위되기 전인 10월달 까지는 고니시의 순천왜성과 시마즈의 사천왜성사이에 활발히 연락선이 오고 갔었지요. 

 

고니시 순천왜성

 

이에 대해 이순신은 뇌물과 요구사항을 묵살하고 사신을 죽이려다가 참고 돌려보내게 되지만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연락선 1척의 통과를 허용하게 됩니다. 

 

 

겨우 연락을 취할 수 있게된 고니시는 1598년 12월 11일, 연락책 4명이 탄 연락선이 명나라 수군 측 포위망을 통과해 시마즈의 사천왜성으로 향하게 됩니다. 통제사 이순신은 화가나 추격을 명하게되지만 연락선이 한산도를 지나게 되어 결국 놓치고 맙니다. 이 내용이 난중일기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고니시로부터 연락을 받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현재 남해군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사위인 요시토시,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에게 남해 창선도로 소집령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군 창선도

 

이로써 조명연합군은 서쪽의 순천왜성 일본군(고니시) 창선도 동쪽 창선도의 일본군 사이에 포위된 형국에 놓이게 됩니다.


3. 전투의 시작

이순신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전투에 앞서 다음과 같이 맹세합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데 반드시 이 적을 섬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1598년 12월 15일 오후 이순신은 진린을 찾았고 전라좌수영에서 드디어 출동하게 됩니다. 명군 수군제독 진린과 등자룡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출전하였고 수많은 사선과 호선들이 뒤 따랐습니다. 이순신은 조선 함대를 셋으로 나눕니다. 서쪽의 순천왜성(고니시)을 위장공격하려는 극소수의 위장함대가 하나요, 동쪽의 노량해협을 포위하려는 본함대와 복병함대가 나머지 둘입니다. 

 

이때 병력규모를 살펴보면 조선수군은 판옥선 약 60척, 협선과 방패선 약 180척이었으며 병사는 약 7000명정도로 추산되며, 명나라 수군은 18000명에 선물받은 판옥선 2척을 포함한 사선과 호선을 합쳐 300척의 대규모 함대였습니다. 이에 대항한 시마즈 및 일본 연합함대는 안택선, 세키부네 350척에 병력 23000명 정도였습니다. 

 

노량 진격

 

전라좌수영에서 노량해협까지는 24km, 오후에 출발한 함대는 4시간정도 후 해가 지고 노량해협에 도착합니다. 

 

 

같은 날인 1598년 12월 15일 해가 지고 한밤중 셋으로 나눴던 이순신의 함대 중 하나가 서쪽의 순천왜성(고니시)을 포위사격을 시작합니다. 이에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이 연락선이 나간것을 알자 구원병이 오기 전에 순천왜성을 함락하려는 것으로 보았고, 이에 급해져 봉화가 아닌 산을 불태우며 자신의 위급함을 시마즈에게 알리게 됩니다. 

 

순천왜성 공격

 

산불 봉화

 

창선도에 정박하고 있던 350여 일본 함대의 수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불길을 보고 조선 수군이 노량을 막지 않고 순천 쪽으로 갔을 것이라 해석하고 노령해협을 빠른 속도로 통과하여 조명 연합군을 뒤에서 요격하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4. 적을 관음포로 유도하라

12월 16일 오전 0시가 지나자 시마즈의 일본 350여척 함대는 노량 해협의 물살이 순천방향(서쪽)으로 생겨날 때 정박하고 있던 창선도를 출발하여 노량을 통과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그림과 같이 노량의 좁은 해협을 통과하자마자 조선 복병 함대가 기습 포격을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순천의 고니시를 잡으러 서쪽으로 갔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함대는 놀라게 되지만 복병함대의 수가 적은 것을 확인하고 이들을 포위하려 합니다. 

 

시마즈 노량 통과

 

 

조선수군 매복

 

그러자 죽도에 매복하고 있는 명나라 대 함대도 전투에 참여합니다. 진린과 등자룡은 선물받은 2척 판옥선의 화력을 앞세워 돌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전면전을 하여 시간을 소비하거나 다시 노량으로 되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는 방향 그대로 남쪽으로 전진을 시도합니다. 

 

관음포 유도 포위

 

12월 16일 오전 2시, 포격을 받아가며 전진하기 시작하여 퇴로를 찾는 일본 350척이 관음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순신의 수군 본대가 드디어 등장합니다. 관음포는 그 포구가 넓고 깊어 밤에 보면 그냥 먼 바다로 보일 정도로 헷갈리기 쉬운 곳입니다. 아마 처음 이 관음포 입구에 도착한 일본군은 넓은 바다라고 착각하고 이순신의 추격을 뿌리쳤다 생각했겠지요. 

 

관음포 진입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관음포 깊숙히 들어간 일본군은 아차 싶었습니다. 넓은 바다라고 생각했지만 앞은 막혀있는 항구였으니깐요. 앞은 포구가, 뒤는 조명 연합군으로 포위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시마즈는 선택권이 별로 없었습니다. 살아서 나가려면 포구에 정박하여 산으로 도망치거나 관음포의 포위를 뚫고 큰 바다로 나가야 했지요. 시마즈는 정면돌파를 선택합니다. 

 

관음포 포구

 

1598년 12월 16일 오전 2시, 조명연합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됩니다. 죽이려는 자와 살려는 자와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펼쳐집니다.


5. 불타는 관음포

이순신의 본 함대는 삼각 돌격형인 첨자찰진으로 일본 수군함대 옆면에 등장합니다. 공격이 시작할 즈음 마침 북서퐁이 불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조명연합군의 불화살, 신기전, 불붙은 짚섬등으로 화공을 취하기 시작합니다. 앞이 두터운 방어형 어린진으로 전진하던 일본 수군의 옆면을 공격해 지휘부를 집중 타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자 일본 함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첨자찰진

 

이때 이순신의 위장공격으로 혼란에 빠졌었던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이순신에 속았음을 알고 군영을 정리하고 빠져나가기 위해 출항합니다. 

 

 

새벽2시에 시작된 전투는 새벽내내 진행됩니다.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의 선봉대가 불능에 빠지자, 시마즈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을 뚫어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박살난 선봉뒤의 중위, 후위군의 배들을 빠르게 몰아 명 수군을 향해 돌진하지요. 여기서 어이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관음포 해전

 

명 수군 등자룡이 탔던 판옥선에서 불이 났는데 이는 일본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 아군이 잘못 쓴 포에 의해 불이 난것입니다. 안그래도 명 수군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던 일본군이었는데 마침 대장선인 등자룡배에 불이 났으니 목표가 잘 보이게 됩니다. 일본 함대는 이 배로 공격을 집중하게 되고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 침몰합니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왔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등자룡

 

등소평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하나, 등자룡은 삼국지를 읽은 분이라면 다 아는 촉나라를 멸망시킨 그 등애의 후손입니다. 또한 근현대, 중국 국가주석이었던 등소평은 이 등자룡 장군의 후손이기도 하지요. 

 

 

이 기세를 몰아 일본군은 진린의 판옥선에도 공격을 퍼부었으나 이순신의 본 함대가 지난 순천왜성에서처럼 또다시 진린을 구하러 옵니다. 명나라 수군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선 수군 함대는 처음 공격을 시작할 때 돌격형인 첨자찰진에서 포위하는 학인진 형태로 변경되었고, 이 포위진을 점점 좁혀가며 전투를 진행합니다. 

 

하지만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기에 조준이 어렵고 피아 식별이 쉽지 않아 평소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화포를 발사해야 했고, 기존 해전과는 달리 백병전이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도 꽤 많은 피해를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지요. 

 

새벽 7시 경, 명나라 수군 방향으로 돌파하려는 일본군의 시도가 실패하고 바닷물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이 시간의 파도는 썰물이 아닌 밀물로 바뀌게 되고 일본 수군의 탈출은 더더욱 힘들게 됩니다. 파도를 타고 조명연합군은 관음포 입구를 봉쇄하고 포위 섬멸전을 시작하고, 일본 수군 역시 이를 돌파해 살아나가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시작하지요. 

 

관음포 해전

 

순천왜성을 출발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가 뜨고 시마즈의 구원함대가 관음포에 갇힌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돕지 않고 치사하게 먼 바다로 탈출하여 부산포로 향합니다.

 


6. 그의 죽음

12월 16일 오전 8시, 일본 수군은 명나라군 쪽이 아닌 이번엔 이순신의 대장선 방향으로 탈출하려 시도합니다. 이는 시마즈 요시히로 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는 전국시대 시마즈 가문의 스테가마리라고 하는 전략으로서 불리한 상황일 수록 적의 대장쪽을 공격하여 전세를 뒤집는 전략입니다. 

 

이에 이순신 대장선을 비롯한 전라좌수영 군이 돌파를 시도하는 선박들을 추격 및 포위하게 됩니다. 이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탔던 안택선이 불타고 반파되어 작은 배로 옮겨타야 할 만큼 큰 피해를 입고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이때 일본 수군 후방에 머무르고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수군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관음포를 겨우 빠져나와 이순신의 함대 뒤에서 후방을 찌르고 공격해 들어옵니다. 

 

관음포 난전

 

이 관음포 전투의 특성상, 백병전이 자주 발생했으며 특히 이 순간 조선, 일본 수군간 난전이 발생하게 됩니다. 타치바나의 등장에 시마즈는 결국 탈출에 성공하고 되지요. 이 난전에서 이순신의 함대를 비롯 많은 전라좌수영 수군들이 피해를 봅니다. 물론 일본 수군도 개 박살이 나게 되지만요. 

 

 

이 난전 과정에서 대장선에 동승했던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조총에 6발이나 맞고도 전투를 독려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그리고...우리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님도 전사하고 맙니다.

 

이순신 전사

 

징비록 및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등 다양한 기록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경위와 그 이후의 수습 및 전투까지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혈전을 치루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징비록에서는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적혀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에서, 이후 싸움에서는 손문욱(항왜,도요토미 양자)이 이순신 전사후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게 하였고 이러한 손문욱의 활약으로 마지막까지 전투를 잘 치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조때 변경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순신 전사 후 그의 조카 이완이 대신 지휘했다고 기록을 변경했지요(불멸의 이순신에서 이렇게 나옴)

 

노량해전 대승

 

12월 16일 정오가 가까워오자 전투는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왜선 200척 이상이 파괴되었고 100척이상 나포했으며 관음포는 시체, 판자, 무기, 갑옷이 뒤덮여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시마즈 함대는 겨우 50척만 관음포에서 탈출했으며 100척의 병력은 관음포에서 배를 버리고 탈출, 남해도에 상륙하여 도주합니다. 2틀뒤 이 상륙한 자들은 남해왜성으로 들어갔으나 곧 소탕되지요. 

 

노량해전의 병력과 피해 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노량해전 병력 및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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