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사태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같은 해 12월 12일,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전두환이 군사 구데타를 일으킵니다. 독재를 이어오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커지던 그 때 또다시 군사반란이 일어나 군이 나라를 장악하고 독재는 이어집니다. 마치 고려시대 무신정변처럼 집권자만 바뀌었을 뿐 전횡과 비리, 독재의 시기는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수 많은 민주 열사들의 희생과 국민들의 노력으로 8년이 지나서야 문민 정부가 들어서게 되지요.
이번 시간에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군사쿠데타, 12.12 군사반란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6에 대한 다양한 설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12.12 군사반란
1. 권력의 공백이 생기다
10.26으로 권력 서열 1위가 없어지자 정국은 암흑속으로 빠져듭니다. 10.26의 주인공 김재규가 김계원의 밀고로 새벽 4시에 체포되고, 육본 회의실에서는 고위관료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비상초지를 내리게됩니다. 부총리 신현확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야 한다 주장합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최규하 총리는 권한대행이 되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이 비상계엄이 최규하의 결정적인 실수였지요.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 전국이 아닌 부분계엄이기 때문에 스스로 군 통제권을 포기하는 조치였습니다. 전국 계엄이라면 총 책임은 대통령에 있지만 부분계엄은 국방부 장관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죠. 정치 싸움에 말려들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선택한 조치였습니다. 이 덕에 계엄사령부가 권력의 핵심이 되었고, 더불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했지요.
또한 당시 국방구 장관 노재현은 심약한 인물이었고 전두환과 친했기 때문에 훗날 정승화 총장과 전두환이 다툴때에도 전두환 편에 서게 됩니다. 여러모로 최규하 총리의 선택이 아쉬운 순간이었죠. 아무리 권한 대행이라도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면 역사의 평가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민주화도 그만큼 빨리 올수 있었겠지요.
정승화 총장은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참모차장), 장태완(수경사령관), 정병주(특전 사령관)을 지휘계통의 적임자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며, 10.26에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하였습니다.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데 핵심이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육사 11기가 중심이 된 군부내 사조직 하나회 파벌과의 세력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2. 반란의 씨앗 하나회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군대 내 불법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육사 11기 출신들이 주력이었고, 이들이 서서히 군부 내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박정희의 5.16으로 권력을 잡았던 세력을 위협할 만한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따라서 이들에 대한 불만도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또한 10.26으로 차지철이 사망하고 김재규도 체포된 이상 제대로된 정보기관은 보안사령부밖에 없었던 것이 전두환의 세력이 커진 원인이 되었습니다. 10.26 이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전두환이 맡으면서 합법적으로도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군검찰 모두를 통제하게 되지요. 최고의 정보력 및 수사력을 손에 쥐고 있으니 전두환의 전횡은 점점 심해집니다. 정치인들의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고, 10.26의 수사내용을 편집하는 등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권력을 이용합니다.
정승화 총장은 이러한 전두환의 전횡을 보다못해 전두환을 향해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충고할 정도였습니다.
10.26의 피의자였던 김계원 전 비서실장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9억(현재 300억)의 수표를 발견하게 되는데(박정희의 비자금이었던 것으로 보임), 이 돈 중 박근혜에게 6억원을 주고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5천만원을 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 총장에게 2억원을 전달해 포섭하려 했으나 핀잔만 듣고 실패합니다. 이 일로 정승화는 전두환의 기세를 꺾으려고 계획합니다.
3. 정승화의 계획
하나회와 전두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정승화 총장은 이들을 치기로 결심합니다.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이동할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국방장관과 상의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노재현은 전두환의 편이었지요. 또한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 권력에서 밀어내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웁니다.
또한 당시 훌륭한 군인으로 평가받건 갑종 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하나회의 불온한 움직임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총장의 의도는 노재현 국방장관이 전두환 측에게 전달하면서 시작전부터 삐걱됩니다. 모든 정보력이 집중된 보안사와 전두환은 이미 사전에 이러한 정총장의 계획을 빨리 감지한 것이지요. 은밀히 진행될 수 있던 계획은 없었습니다. 하나회가 군 내부 요직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4. 정승화를 체포하라!
이러한 정승화 총장의 의도와 계획을 알아차린 전두환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역으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군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정총장의 체포 명분은 10.26사건 현장에 있어 연루되었단 죄를 뒤집어 씌울 생각이었죠. 전두환은 정승화, 김재규가 한 패였다고 주장하면서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을 모아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1주일만에 결의합니다.
12월 12일로 결정한 이유는 12월 12일이면 장성 진급심사가 끝나 일정에 여유가 생기는 점, 동시에 정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기 전에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작 전두환은 훗날 재판당시 숫자 짝을 좋아해서 그 날로 결정했다고 증언합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와 사전공모한 것이 추가 조사 결과 드러났다고 거짓말을 하며 정승화를 체포하기로 합니다.
5. 반란의 시작, 정승화 체포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드디어 작전을 개시합니다. 하나회에 속한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하고 경복궁 옆 구 일본 헌병 주둔지(현재 경복궁 태원전)에 위치한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장세동 보병 대령)에 집결합니다. 이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수경사 소속 서울 방위 정에부대여서 수경사령관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독립적인 부대였습니다. 이날의 작전명은 "생일 집 잔치"라 명명됩니다.
전두환의 원래 계획은 보안사 수사관들과 육군 수경사를 동원, 정승화를 납치함과 동시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정승화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아 체포 행위를 합법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과정에서 대통령 재가 없이 일을 진행하는데, 이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 계획이 알려질 경우의 반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 보병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과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승화 총장 관저를 찾아가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명분으로 정승화의 신병을 확보하고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옵니다. 동시에 정승화 총장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재가를 받으려 하지만 최규하가 이를 거부하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최규하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상의를 한 후에야 재가를 검토하겠다고 버팁니다. 예상외의 최규하 반응에 전두환은 당황합니다.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가족들과 도망가버린 후였지요. 후에 노재현은 국방부로 돌아온 후 반란군에게 체포당합니다. 당시 노재현은 구데타를 방지하고자 야전부대를 한미연합사에 배치 시키고자 동의를 구하려 한미연합군사령부로 이동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존 위컴의 반대로 무산되었죠.
결국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를 체포한 격이 되버려 합법적인 절차로 만들려던 전두환의 계획은 일단 절반의 성공으로 끝납니다.
6. 반란을 막아라
12월 12일 당일, 정승화를 체포하는 동시에 반란 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저항을 대비하기 위해 친 정승화 라인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을 연회에 초대해 둡니다. 이떄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 준장이 대신 미리 접대하도록 하며 이들의 발을 묶기로 합니다. 이때 수경사 헌병단장이었던 조홍대령도 와 있었는데, 하나회 소속은 아니지만 이 셋을 감시하고자 와 있었지요.
이 세명은 전두환을 기다리며 저녁 7시까지 전두환을 기다리며 먼저 식사를 하게됩니다. 그러나 우국일 준장이 하나회 소속은 아니어서 정보가 통제되지 않았고, 또한 김진기 헌병감을 통해 총리공관에서 총격이 발생하고 정승화 총장이 납치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바로 3명은 일어나 복귀합니다.
장태완은 수경사로, 정병주는 특전사로, 김진기는 육본으로 복귀합니다. 육본측에서는 정승화 총장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파악을 했고 곧 합수부, 전두환이 이들을 납치한 사실을 깨닫고 전군에 비상을 걸게 됩니다. 수경사령부로 가면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신윤의 중령에게 경장갑차 2대, 헌병 특공대 1개소대, 부상자 구조를 위한 구급차 1대로 기동타격대를 꾸려 총장공관으로 급파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후 사령부로 복귀한 뒤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 및 하나회가 모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0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거나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유학성과 황영시가,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예기를 해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에 장태완은 화가 나서,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거라! 내 전차를 몰로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다!"
라며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있던 반란군은 장태완의 공격을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장악하고 있었던 대통령경호실 소속 병력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 및 장악합니다. 그리고 최규하에게 계속 정승화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요구하지만 노재현 장관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말에 노재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또한 전두환은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완전히 무시한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비해 참 군인 장태완은 여기에 반발하면서 전두환을 반란수괴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수도권의 충정 부대를 대상으로 병력 출동을 독촉하게 됩니다.
장태완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위급했던 순간을 알 수 있습니다.
7. 병력의 출동
전두환은 장태완의 저항에 당황하지만 슬슬 군 주도권 장악을 위한 계획을 시작합니다. 겉으로 육본과 신사협정을 맺고 상대방의 병력을 묶음과 동시에, 자신들은 전방에 있는 병력을 본격적으로 동원하게 됩니다. 작전에 앞서 1,3,5 공수여단장들에게는 미리 지시를 내린바가 있었습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여단장가운데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는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습니다. 30사단 관할이었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장태완)의 통제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전두환은 1,3,5 공수여단에게 명령을 하달합니다.
1공수여단(여단장 준장 박희도)을 동원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도록 함.
2공수여단(여단장 준장 최세창)은 3공수여단 영내에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을 습격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3공수여단(여단장 준장 장기오)은 효창운동장에서 대기.
위와 같이 지시했으며 하나회 소속 장교들로 하여금 수경사 헌병단을 장악하고 수경사로 지휘부를 옮긴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을 제압하도록 명령합니다. 이외에도 사단장으로 있던 노태우의 9사단 중 29연대와 30연대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중 9사단은 지금도, 그 당시에도 우리나라 최전방 정예의 예비사단입니다. 당시에는 평시작전권까지 주한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단을 동원하려면 한미연합군사령관(존위컴)의 동의를 받아야만 합니다. 사태이후 이 사실을 알게된 존 위컴은 매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진짜 여기서 전두환이 얼마나 권력에 욕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방의 군까지 동원한다? 이 부분에서 정말 비난 받아도 할 말 없는 매국질을 한 것이지요.
이 9사단 예하 1개 연대를 무단으로 동원한 노태우는 이 일로 전두환에 이어 권력 2인자에 오르는 중요한 업적을 세우게 되죠. 북한의 동향까지 살펴야 했던 진압군 육군본부는 전방의 부대를 차출할 엄두를 내지 않지만 전두환은 달랐습니다. 북한이고 뭐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전방군까지 차출합니다. 두고두고 이일은 매국노 짓으로 기억되겠죠.
8. 눈물의 회군
갑자기 9공수여단이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지시로 서울로 오고있다는 소식이 보안사에 전해집니다. 앞서 예기한바와 같이 1,3,5 공수여단은 이미 반란군에 가담해 있었고 남은 것은 9공수여단 뿐이었습니다.
9공수여단은 경인고속도로로 오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기에 전두환은 당황합니다. 아직 전두환의 명령을 듣는 공수여단의 지휘관들이 부대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행주대교 등의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습니다. 9공수여단이 먼저 서울에 도착할 것이 자명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자결을 결심했었다고 회고합니다.
전두환측은 이 9공수여단의 출동을 막기위해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반란군 중장 유학성과 중장 황영시는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시내에서 전투를 벌일 수 없다며 우리도 무력동원을 안할테니 9공수여단을 복귀시켜라라며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합니다.
이때 육본의 수뇌부들은 말도 안되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 신사협정을 믿어보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당시 육본은 북한의 침입을 고려 안할 수 없었고, 위험한 상황에서 내전을 벌일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는 판단이면서도 이해가 안가는 판단이기도 합니다. 이미 쿠데타로 반란을 시작한 전두환과 신사협정이라니 참 웃기지도 않습니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신사협정을 결국 육본이 수용합니다. 정승화 총장이 없는 육본 진압군의 실질 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윤성민은 결국 9공수여단장 준장 윤흥기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부천IC에서 회군시키게 됩니다. 전두환의 낚시질에 걸린 육본은 결국 처참한 결과를 보게 됩니다.
9. 반란의 성공
결국 9공수여단은 회군하고, 당연히 신사협정을 껜 전두환은 1공수여단을 서울로 진입시켜 바로 국방부와 육본을 접수합니다. 아주 손쉽게.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는 최세창의 3공수여단에 의해 점령됩니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의 명령을 받은 예하 15대대장 중령 박종규에 의해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고, 특전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은 단신으로 사령관을 지키려다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도망갔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국방부로 돌아왔다가 반란군에 체포되었고, 이때부터 반란군에게 비굴하게 협조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남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반격할 준비를 합니다. 그는 김기택 참모장에게 아래와 같이 지시하지요.
전차를 선두로 수경사 내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구성하며,
목표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로 하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앞,
출발은 장태완 본인이 앞장서며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잡아 전차포, TOW 대전차포, 106mm무반동포, 3.5로켓포로 2개 목표를 동시에 타격후 반란수괴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장태완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3군사령관에게 병력 동원이 가능한지 물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하게되고, 장태완은 병력들이 집결한 연병장으로 가게 됩니다. 전차에 가는 그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나타나 30경비단 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에서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린다고 보고합니다. 겨우 전차 4대뿐이고 병력도 얼마 없는데 어떻게 하겠냐며 하소연을 하게되고 충돌을 피하자 예기합니다.
전차 무전에 귀를 귀울인 장태완, 형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합니다. 허탈해하며 병력을 해산시키고 사령부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가 헌병대를 이끌고 장태완 사령관과 수경사로 피난왔던 육본 지휘부를 모두 체포하게 됩니다.
이로써 한국 근현대사의 치욕의 역사 12.12 구데타는 성공으로 마무리되며 이후 8년간 전두환의 전횡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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