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홀로 끝까지 반란군에 맞서다, 참군인 장태완 소장의 생애

cky0214 2023. 12. 9.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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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아무런 명분없는 12.12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육군본부 쪽 인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이를 저지하거나 진압할 노력을 하지 않는 가운데 홀로 이들과 맞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제 7대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입니다. 

 

장태완 소장

 

그는 국민과 일선 병사까지 생각할 줄 아는 참 군인이었으며, 전두환과 같은 권력욕에 가득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참 군인이었습니다. 최근 서울의 봄 영화에서 정우성씨가 연기한 이태신 소장의 실제인물이지요. 

 

이번 post에서는 장태완 소장의 생애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12.12 에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현대판 무신의 난, 명분없는 정신나간 12.12 군사구데타

1979년 10.26사태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같은 해 12월 12일,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전두환이 군사 구데타를 일으킵니다. 독재를 이어오던 박정희의 죽음으로 새 시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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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소장


1. 6.25와 군경력

장태완(張泰玩)은 1931년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출신으로 3남3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때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11기로 임관하게 됩니다. 전쟁당시 총알받이나 다름없던 육종 소위 중 살아남은 몇 안되는 장교였지요. 1951년 8월 향로봉(고성군,인제군에 걸친 봉우리) 전투에 참전하여 926고지를 탈환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후 중령시절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파병되었으며 , 대령 시절 제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차장에서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합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장과 제5군단 참모장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 윤필용 사건 이후 비육사 출신의 한계에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되어 2년간 근무하게 됩니다. 

 

장태완 중령시절

 

장태완 중령시절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어 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육본 교육참모차장으로 근무하다가 12.12가 발생하기 한달전인 1979년 11월 16일부로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보직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2. 하나회와의 악연

후에 대립하게 되는 전두환과 장태완 사이에 악감정이 생기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된 사건이지요. 부하 중 육사15기 출신 김상구의 항명이 계속되자 김상구를 영창에 보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상구는 하나회 일원이었으며, 전두환의 손아랫동서로서 친인척 관계이고 이순자의 여동생과 결혼한 사람이었지요. 

 

 

1973년 6월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하고 2달째, 장태완은 서울 서부지역의 수경사 방공 진지 공사 현장에 순시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막사앞에 가자 방공포 대대장 김상구 중령이 그를 맞이하고 경례를 합니다.

 

김상구

 

김상구 중령과 벌컨포 공사 현장으로 간 장태완 준장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게 됩니다. 전방 부대원들은 온전히 손발로 하는 공사를 여기서는 중장비로 편하게 하면저 진지공사를 위한 잔손질은 얼버무린 대충하는 공사로 보였기 때문이지요. 장태완준장은 김중령에게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됐나?"

 

이에 자존심이 상한 김상구 중령은 여러차례 하극상의 발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당신보다는 군사학을 더 공부하고 임관했소"

 

중령이 준장에게 할 수 없는 발언들을 쏟아냈고, 화가 난 장태완은 자신을 내치던지 김상구를 구속시키든지 선택하라고 사령관에게 따지게 되죠. 이 일로 결국 김상구는 영창에 들어갔다가 전역하고 맙니다. 하나회 계열 장교들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이 생기게 된 사건입니다. 전두환도 마찬가지지요. 

 

하나회


3. 12.12와 진압군

1979년 11월 16일, 정승화 참모총장은 강직했으며 하나회와 거리가 먼 장태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전두환과 하나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지요. 한달 후 12.12 군사구데타가 발발합니다. 여기서 장태완은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윤군 헌병감과 함께 끝까지 저항하게됩니다. 

 

 

하나회 및 전두환의 계획에 의해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려는 그 때, 장태완은 동료 장군 한명과 연희동에 있는 술집으로 초대받게 됩니다. 이 또한 전두환의 술책이었지요. 식사도중 정승화의 체포소식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수도경비사령부로 급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판세는 기울어져 가는 형세였습니다. 

 

반란군은 이미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장태완을 회유합니다. 그러나 장태완은,

 

"마 너거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라며 무시했고 행동에 나섭니다. 

 

장태완 통화

 

 

장태완 육성증언

 

 

장포스 장태완

 

정승화 총장의 구출을 위해 경비병력을 보내기도 했으며 육본에서 도망쳐온 육군 수뇌부 및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논의하여 33경비단의 전차중대를 보내 반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또한 9공수여단을 불러 반란군 본거지 30경비단과 보안사를 공격하라라고 지시하기도 했지요.

 

 

여기서 육본 수뇌부들의 뇌절의 실책이 나오게 되지요. 바로 반란군의 신사협정을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반란군도 군을 돌릴테니 9공수여간도 회군시켜라라며 협상을 하지요. 결국 9공수는 퇴각하고, 반란군은 육본을 점령하고 특전사사령부를 공격해 점령합니다. 

 

9공수여단 회군

 

이제 남은 것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휘하의 100명 남짓한 병력, 그리고 전차 4대가 전부였습니다. 이를 전부 소집하여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다 죽을 거라는 장교들의 설득, 노재현 국방장관의 투항 권유, 도청, 마지막으로 헌병단 신윤희 중령이 헌병단을 접수하고 수경사 수뇌부에 들이닥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더이상 할 게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하였던 배신자 신윤희에 의해 체포되고 말지요. 


4. 체포 후의 고통

체포된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들어서자 마자 이곳이 그 악명높은 빙고 호텔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하지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수사를 받는데 옆방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갇혀있었다고 합니다.

 

 

다음해 1980년 2월 예편서를 쓰라는 강압을 받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쓰게되면서 군생활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장태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는데요,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한탄 속에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1980년 4월 과음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1982년 아들 장성호(21세)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공부를 매우 잘해서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장태완 가족

 

행방불명된 아들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꽁꽁 얼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올라오는 동안 장태완은 혀로 시신을 녹였다고 합니다. 

 

1993년 국회출석 장태완 증언

 


5. 이후 그의 삶

이 후 전두환은 장태완에게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고자 했고 장태완은 이를 수락합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회의를 거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이를 수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태완은 죽을 떄까지 전두환을 비판했지요. 

 

1989년 사장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가 1995년부터는 건설기업 르메이에르의 회장직을 맡기도 합니다. 

 

1994년 처음으로 치뤄진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경선에서 승리한 후 2회 연속으로 당선됩니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잡아들이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지요.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영입에 따라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활동 당시 군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에서 주로 활약을 했었고 성향은 안보 보수파에 가까웠습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민주당 고문직을 맡았습니다. 

 

2008년 폐암이 발병하여 암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으나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장태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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