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노익장을 과시했던 명나라 야전사령관 등자룡 장군, 등소평이 후손

cky0214 2023. 12. 1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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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등자룡 장군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애국 장수로 추앙받는 대표적인 영웅입니다. 정유재란 시 진린과 함께 조선에 출병하여 노량해전에서 큰 활약하였고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인물이지요. 우리에게는 단지 명나라에서 파견된 지휘관이었지만, 명나라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여러차레 큰 공을 세웠습니다.

 

등자룡

 

또한 조선 원병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일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인물이기도 했지요.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에서 그의 휫날리는 하얀 수염이 기대되네요.

 

이번 post에서는 등자룡 장군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노량해전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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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룡


1. 그의 선조, 후손

등자룡(鄧子龍)장군의 생애를 살펴보기 전에 그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면, 등자룡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등애의 후손이며 중국 국가주석이었던 등소평이 등자룡의 후손입니다. 

 

등애

 

아래와 같은 산길을 3만명과 함께 직접 넘었다고 하지요.

 

등애 산악왕

 

 

등애(197~264년)는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 아는 위나라 무장입니다. 삼국지 게임에서도 무력,지력 모두 능력치가 높아 문무를 겸한 장군으로 나오지요. 그는 유비가 세운 촉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며, 촉나라 공격 당시 검각을 우회하여 산악지역을 우격다짐으로 넘은 놀라운 행보를 보입니다. 그래서 삼국지 팬들사이에서는 산악왕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등소평

 

그의 후손인 등소평은 중국의 국가주석으로서 마오쩌둥 시기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진 중국을 개혁, 개방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2. 생애와 명에서의 활약상

등자룡은 1531년 강서성 풍성(豊城) 낙성교(落星橋) 무계 등촌에서 태어납니다. 현재의 장시성 이춘시 두스진 덩자촌 출신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생김새가 우람하고 몸이 날랬고 민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서법에 능하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풍수설", "진법직지", "횡과집"등의 책을 남기기도 합니다. 

 

장시성

 

 

등자룡

 

1558년 27살의 나이로 명나라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관 후 강서성 청강현에 도적들의 약탈이 발생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이후에도 공적을 쌓아 광동파총에 오릅니다. 복건성과 광동성 연해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왜구의 습격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후에 등자룡이 정유재란에 참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573년에 장원훈 아래에서 뇌원작을 토벌하고 반란을 일으킨 진금앵과 나소청을 토벌했으며 도적의 우두머리인 황고휘를 공격하여 산속에서 생포하였으며, 동고석 지역에 부임하여 도지휘검사, 절강도사까지 오릅니다.

 

등자룡

 

이후 절강의 도사직을 월권하는 일을 벌여 삭탈관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지만 죄가 가볍다는 이유로 명 황제 만력제는 죄를 사하게 됩니다. 때마침 마양에서 난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출병하여 이를 토벌합니다. 

 

 

1583년 미얀마의 목방부가 운남을 공격해 들어오자 영창지역에 파견되었고 반지화에서 미얀마 군대와 격렬히 싸워 이를 격퇴했으며 적의 소굴까지 처들어가 수장들을 생포하게 됩니다. 이 공로로 부총병에 발탁됩니다. 이 과정에서 등충지역에서 징집한 등병을 이끌던 유정과 사이가 나빠져 서로 싸운기록도 있습니다. 이때 등자룡은 영창지역에서 징발한 요병을 이끌게 됩니다.

 

명나라 유정

 

유정이 파면되어 유천봉으로 교체가 되었는데 이때 등자룡은 요병, 등병 모두를 이끄나 자신이 이끄는 요병을 우대하고 등병을 학대하면서 토목공사를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혹독하여 등병이 이에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지요. 이 일로 등자룡은 문책받아 하리로 면직됩니다. 

 

1590년 맹양에서 사개가 반란을 일으키자 오정이란 자가 황제에게 등자룡에게 죄를 씻을 기회를 줄 것을 주청하였고 받아들여집니다. 이후 오정의 지휘아래 등자룡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게 되고 원래의 지위를 회복합니다. 그러나 얼마안가 다시 탄핵받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3. 정유재란 참전 일화

1598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등자룡은 원래의 지위를 회복하고 수군을 이끌고 진린을 따라 68세의 나이로 조선으로 파병됩니다. 참전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진린이 명황제 만력제의 명을 받고 수군 출병 준비를 할 때, 70세에 가까운 백발노인 등자룡이 9명의 아들과 5명의 처첩, 식솔 수십명과 하인 200명이 하얀 옷에 흰 두건을 두르고 진린을 찾아옵니다. 등자룡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싶어 찾아 왔으니 원한을 갚게 해달라고 하자, 진린이 사적인 원수는 국법으로 허가된 것이니 찾아온 무리에게 칼 한 자루 씩 쥐어주어 죽기로 갚으라고 합니다.

 

진린

 

등자룡은 "원수가 바다 건너에서 저 누런 바다를 넘어 조선을 침범한 작은 키의 야만족이라면서 조선에 들어온 왜적의 피를 마시고 그들의 심장과 간을 씹어 먹으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옛날 조나라 염파는 80나이에 한 끼 식사에 고기 열근을 먹고 술을 닷말을 먹었으며 후한의 황충과 엄안은 단기로 적장의 목을 베었으니 장사에 나이가 어찌 있겠느냐" 며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 말합니다. 

 

 

등자룡

 

진린은 등자룡을 향해 "영감은 참으로 영웅입니다"라고 탄복했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일화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등자룡은 가산을 털어 병선을 하나 사서 아들 9명, 가족 수십 명, 하인들 200명과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4. 노량에서 진 꽃

등자룡은 진린 제독의 휘하 부총병으로 정유재란에 참전합니다. 절강과 직예 출신의 정예병을 이끌고 참전하게 되지요. 명사(명나라 역사서) 등자룡 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만력 26년(1598년)에 왜가 장차 바다를 건너 피하려하자(후퇴) 진린 도독이 급히 등자룡을 급파, 이순신과 함께 수군 1000명을 거느리고 3척의 전함을 몰아 선봉이 되었다. 등자룡은 평소에도 강개해 나이가 70이 넘은 나이에도 의기를 더욱 가다듬어 으뜸의 공을 세우고자 했다"

 

노량해전

 

실제 등자룡은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수 많은 공을 세웠으며 노량해전에서는 별도의 수군 일천명을 거느리고 이순신과 함께 참전하게 됩니다. 시마즈가 마지막 관음포에서 포위를 뚫으려 명 수군 쪽을 진격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진린 장군이 왜병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진린의 아들이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노량해전

 

이를 본 등자룡은 이순신이 선물한 판옥선으로 바꿔 타고 진격하였으나, 명나라 수군이 그의 배를 왜선으로 오인하여 포격을 하게 되고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 배는 더이상 운행이 불가능했고, 왜군선 사이로 배가 흘러가게 되면서 배에 왜군들이 올라타게 됩니다. 백병전을 벌이다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의 칼에 등자룡 장군은 전사하고 맙니다.

 

치열했던 이날의 전투에서 결국 전사하게 되는 등자룡에 대해 명사에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등자룡

 

"등자룡은 200명을 이끌고 조선 군사의 배(판옥선)에 뛰어올라 바로 앞에서 분격하니 죽거나 다친 적들이 셀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배가 화기를 말못 쏴서 등자룡의 배에 불이 붙은 통에 더 이상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왜군선 사이로 흘러가는 사이에 배에 오른 왜 수군에 의해 등자룡 장군이 전사하였다"

 

결국 등자룡은 왜군의 습격을 받아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등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5. 그의 사후

등자룡 장군의 사후 명나라 조정은 그를 도독첨사로 추증하였고,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세습하게 했습니다. 조선에서는 탄보묘에서 등자룡을 배향하기도 하지요. 원래 탄보묘는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요, 현재 등자룡의 위패는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세워졌습니다. 전사하기 전, 노량해전 참가에 앞서 명나라 진린과 등자룡이 고금도에서 승리를 위해 관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입니다. 

 

고금도 탄보묘

 

이 후 진린, 등자룡, 이순신의 위패가 함께 배향되었고 1763년(숙종 39년)에 어필로써 탄보묘라는 사액을 받아 탄보묘로 불리게 됩니다. 

 

등자룡 묘소

 

중국 본토에는 등자룡의 집안이 대대로 거주한 지역인 풍성시 두시진 무계 등가촌 앞에 그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의 묘소는 강서성과 풍성시의 중점문물보호단위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등자룡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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