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이순신의 호위무사 군관 송희립 장군,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함께하다

cky0214 2023. 12. 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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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7년간의 전쟁 중 이순신 장군님의 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군관 송희립입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부임 후부터 직속 군관으로 활약했으며,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에서부터 노량해전까지 그 마지막을 곁에서 보좌했던 인물이지요. 지략 뿐 아니라 용맹함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송희립

 

이번 post에서는 송희립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노량해전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곱게 보내줄 순 없다. 조일 7년 전쟁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

1597년 9월 임진,정유재란을 일으킨 전쟁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지요. 7년간 전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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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립


1. 군관이 되어 활약하다

송희립(宋希立)은 1553년 전라도 흥양현 대강면 마륜리(현재의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현감으로 있던 송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은 송대립, 동생은 송정립이며 세 형제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합니다.  본관은 여산이며 호는 삼규당, 자는 신중(信仲)입니다. 송간의 6대손으로서 1455년 왕명으로 호남지방을 순시하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전남 고흥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인물입니다. 이 후 송간의 자손들은 고흥에 정착을 하게 되지요. 

 

송희립

 

1583년(선조 16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병과 159위로 급제하고, 지도만호, 양산군수, 다대포첨사, 경상우후 등을 지냈고 1591년 이순신 장군의 직속 군관이 됩니다. 거북선 건조교육과 감독을 하고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 5월1일 거제에서 왜병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 머물며, 이순신 및 원균등과 합동 작전을 벌일 것을 주장합니다. 

 

 

이 후 정4품 지도만호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투를 치루게 되며,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송희립과 이순신

 

원균이 왜적에 패해 경상도해역이 위험에 빠졌을 때 그는,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 도 역시 보전할 수 있다" 라고 하여 이순신이 매우 기뻐하며 대견해 했다고 합니다. 

 


2. 상관과 가족을 잃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왜군은 부산 공략 후, 전라좌수군이 있는 여수 본영과 1관4포가 있는 고흥방도로 재차 침입하여 육지와 바다가 초토와 됩니다. 이때 선조의 명을 이행하지 않은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게 되는데, 송희립은 정경달, 정탁, 황대중과 함께 대궐 문앞에서 거적을 깔고 울부짖으면서 무죄를 주장합니다. 이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지요.

 

 

그의 형 송대립 장군은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을 수행하며 수군 재건 사업을 돕고 육지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고흥 첨산전투에서 많은 수의 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고 맙니다. 


3. 수군재건 후 활약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하고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자 다시 그의 휘하가 되며, 곧바로 명량해전에 참전합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하고, 노량 앞바다에 집결한 왜군은 고니시를 탈출하기 위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 때 이순신은 고흥 나로도에서 송희립에게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계책을 물었는데 이 때 송희립은 명,조선이 바다와 육지에서 수륙양용으로 협공을 가해야 한다고 답했고 이를 들은 이순신은 이에 동의합니다. 

 

노량해전

 

"적이 이미 거점(노량)을 형성하고 있으니 힘으로 취하기는 어려움이 많으니 이제 명군과 아군이 수륙으로 연대하여 만약 육군이 예교를 압박한다면 수군은 장도에 거점하여 영남의 해로를 막을 것" 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이어 "적들은 내외로 막히고 허리 부분 역할을 못해 사전의 적은 반드시 돕지를 못할 것이며 서로 돕고자 하여도 피차간 호령이 통하지 않아 상응할 수 없게 되면 그 군사들은 군량이 고갈되고 군세가 좌절되어 사면이 고립되면 고니시는 살 수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위 대화 내용은 "선조중흥","노량기사"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희립의 계책대로 바다,육지에서 수륙양용으로 몇 개월 봉쇄 작전을 펼치자 왜군들의 세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명나라 진린에게 화의를 청할 정도가 되지요. 이 때 송희립이 나서서

 

"그들이 전령을 보내는 것은 각군에 구원을 청하여 전쟁일자를 약속한 것이니 마지막에 가서는 틀림없이 공격할 것이다. 이곳은 복배와 같은 곳이라 적의 공격을 받으면 아군은 패하게 됨으로 큰 바다로 옮겨 싸우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합니다.

 

 

결국 11월 18일 노량해전이 발발하고, 관음포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담한 포위를 풀기위한 돌격이 명나라 수군을 향해 진행됩니다. 갑작스러운 돌격에 명나라 진린 장군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이때 이순신과 송희립은 왜군들의 집중포화를 뚫고 구출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노출되어 그 위치에 있던 송희립 장군은 중상을 당하게 되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새벽 2시경에 전사하게 됩니다. 그 밖에 명나라 등자룡, 이영남, 이언량 등이 전사하게 되지요. 

 

진린

 

 

노량해전

 

이렇듯 송희립은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 휘해에서 군관으로 종군했으며, 첫 전투인 옥포에서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이순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그를 보필합니다. 다른 부하들은 전공을 세우고 관직이 올라가면서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가고는 했는데 송희립만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킵니다. 


4.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고 1601년 5월에는 양산군수를 제수받았고, 8월에는 다대포 첨사로 제수받습니다. 1611년 광해군 4년에 이순신의 첫 수군 지휘를 맡았던 전라좌수사가 됩니다.

 

1619년 67세의 나이로 별장으로 재직하였고, 주사청의 업무로 경상도에 파견됩니다. 

 

 

1623년 12월 20일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송의립 동상

 

송희립의 위패는 흥양(전남 고흥)의 "세충사"에 배향되어 있으며, 그의 호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동서원", "충무사(한산,고흥,순천)", "무광사"등에서도 배향됩니다. 육군에서는 광주 상무대에도 이순신, 정운 장군과 함께 송희립 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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