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일본수군 배 함선 세키부네와 안택선 VS 조선수군 판옥선 차이

cky0214 2023. 12. 1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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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전쟁에서 일본수군은 칠천량을 제외한 해상전에서 한번도 이순신 함대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전술 뿐 아니라 일본수군과 조선군 사이의 전투방식 차이도 한 몫 했는데요, 이는 두 군 함선의 차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주력 함선은 세키부네와 안택선이었으며 조선군은 판옥선을 주로 사용합니다.

 

판옥선과 세키부네

 

이번 post에서는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 함선을 한 번 비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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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9월 임진,정유재란을 일으킨 전쟁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지요. 7년간 전 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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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부네와 안택선, 그리고 판옥선


1. 세키부네

세키부네(関船)는 1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혼란의 전국시대와 에도막부시대에 걸쳐 널리 사용되었던 함선입니다. 빠른 기동력이 특징인 중소형 군함이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0년 전인 1383년에 일어난 관음포 해전에서 나포된 30척의 세키부네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키부네

 

 

조선 조운선

 

이 세키부네는 일본군의 주력 전투함이었고 한자 그대로 관선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안택선은 주로 기함(대장함)으로 쓰였지요. 크기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지방의 세곡을 수도로 옮기는데 사용되었던 조운선과 비슷한 크기의 함선이었으며,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세키부네는 해전에서 백병전과 근접전에 최적화된 돌격형 충돌함선이었습니다. 세키부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앞이 매우 뾰족하고 용골이 있어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군함이기 때문에, 빠르게 돌진하여 적선에 접근, 적군함에 올라타서 백병전과 근접전을 하는 군함인 것이지요. 

 

 

속도

속도가 매우 빨랐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수군, 고려수군의 함선이 약 7노트(약 13km)에서 9노트(약 16.6km/h) 정도였는데 조선수군의 함대보다 약 5~6노트(약 10km/h) 빨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자 관선을 보면 알수 있는데요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는, 관문(해협)에 배치해두었다가 다른 배가 오면 달려가서 통행세를 징수하는게 주요 업무였지요.

 

큰배가 안택선, 오른쪽이 세키부네

 

규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시절 목할법의 도입 이전에는 군함의 크기가 다 달랐지만 세키부네의 크기는 36척부터 70척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척을 30cm로 보면 10m에서 20m사이인 셈이지요. 대장선인 안택선이나 조선의 판옥선이 100척(30m)정도 임을 감안하면 소형 함선입니다.

 

탑승인원은 약 전투병, 노사공 합해 80명 정도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무리 크게 잡아도 2층 기준 20m라면 면적이 80평보다 작으며 여기에 식량,식수,탄환등의 무기등을 계산하면 1인당 사용면적이 0.5평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갑판까지 포함해서 중형세키부네의 경우에는 노를 30개부터 60개까지 장착하였고 이보다 더 적은 노를 사용하는 소형 세키부네는 고바야라부네 라고도 불렸습니다. 

 

고바야부네

 

판옥선의 경우 배수량이 대략 80톤~280톤 가량이니 이보다 훨씬 작았던 세키부네의 배수량은 더욱 작았습니다.

 

 

구조

일본 화선들처럼 첨저선 형태와 쇠못으로 결합된 선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삼나무로 선체를 만들어서 속도는 빨랐지만 내구도에 있어서 매우 취약점이 있고 장애물 위에서 항해가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판옥선과 다르게 대포는 거의 탑재하지 못하지요. 좌우현의 방패판은 안택선과 같이 문이 달려있어 도선이 쉽고 격군실과 전투갑판의 2층 구조로 되어있긴 하지만 높이가 훨씬 낮습니다.

 

세키부네 형태

 

위 그림에서와 같이 선체의 밑부분이 V자형(협저선)으로 속도가 빠르고 장거리 향해에 유리하지만 우리나라 남해안처럼 암초가 많으면 항해나 방향전환등에 매우 불리한 구조였지요.

 

세키부네는 접근하여 백병전을 치루기에 최적화된 배이긴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거대하고 훨씬 높은 판옥선을 상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일단  판옥선이 다수의 화포들을 탑재하고 있어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설령 접근한다해도 비교적 낮은 뱃전 때문에 아래에서 위를 보고 사격하거나,갈고리를 적선에 걸고 마치 공성전을 하듯이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공략에 애를 먹지요. 도대체 원균은 어떻게 싸웠길래 이런 배를 가진 일본에게 전멸당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 세키부네로는 판옥선에 접근이 어려웠고 우리나라 남해안은 암초와 소용돌이가 심한 곳이 많아 침저선인데다가 가벼운 세키부네의 운용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판옥선은 강철검조차 부러트린다는 평판을 지닌 튼튼한 나무들을 사용하였고 무게도 훨씬 더 나갔습니다. 잘못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지요. 명량에서 충파가 괜히 등장한게 아닙니다. 


2. 안택선

안택선(安宅船)은 일본어로 "아타케부네" 라고 부릅니다. 한자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집이 달린 배란 뜻입니다.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에 개발된 대형 군함이지요. 일본 내에서는 해상의 성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크기와 위세를 자랑하였고, 일본 수군 내에서는 대장선, 다이묘들의 기함의 역할을 맡습니다. 

 

안택선

규모

안택선은 500~1000 석적을 적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석적이 약 150kg이니 약 75~150톤 가량의 선박이지요. 임진왜란 전에 생산된 안택선의 경우 전투병들과 격군을 합해 약 200여명이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50~200명의 격군과 수십명의 전투원 및 화포,화약,조총등의 병장기와 식량, 식수를 실어야 했으니 상당히 큰 규모의 함선입니다.

 

구조

조선군의 판옥선과 마찬가지로 격군들이 노를 젓는 부분인 갑판과 전투하는 최상위 갑판의 2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좌우 방패판은 총구멍이 뚫려 있었고 경첩이 달려 있어 위기시 여기를 열고 다른 배를 향해서 도선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부 선체는 2중 저판에 석회로 물막이를하고 수밀 격벽을 설치하여 방수력을 높였습니다. 선체를 제작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일본의 제작접으로 판재를 맞대로 못을 박아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안택선

 

안택선 옆면

 

조선보다 건조시간이 짧고 선체가 매끄러운 점이 있었으나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지요. 상부 갑판에는 함교인 망루를 세웠고 지휘관, 다이묘들이 자리잡았으며 만들어진 시기나 장소에 따라 그냥 단순한 누각에서부터 작은 성채크기 정도되는 것까지 매우 다양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적 기함 안택선의 크기는 우리 판옥선만큼 컸다고 합니다. 이는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언급한 내용인데, 크기만 컸지 아직 일본에서 도입된지 얼마 안된 함선이었고 탑재 무기에 대한 기준도 없었지요. 따라서 오랫동안 왜구와의 전투로 단련된 조선의 수군의 상대는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기함이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고 수적으로도 매우 적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 판옥선

판옥선(板屋船)은 조선수군의 군함이자 주력전투함입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전선, 판옥전선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이전 여러 왜구와의 전투를 통해서 천자총통, 신기전 및 기타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현대식 해상 전투인 원거리 함포전을 염두에 두고 생산되었습니다. 

 

판옥선

 

1555년 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있은 후 기존의 전선인 맹선의 단점이 지적되었고, 새로운 함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의 주력함선이었던 누전선을 개조하여 생산하기 시작하였죠. 이 판옥선의 설계자는 정극인의 5세손이자 전남 진도군 남도포 만호였던 정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에는 나대용이 연구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키게 됩니다.

 

판옥선 단어중 판옥이란 널빤지 위에 올린 망루나 장대를 의미합니다. 즉 기존의 함선에 판으로 한층 더 쌓고 전투원들의 지휘 및 전투용의 망루를 올린 배라는 뜻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이 서 있는 누각이 바로 판옥이지요. 

 

 

구조

판옥선은 배밑이 평평한 평저선입니다. 판옥선 중 가장 큰 상선은 크기가 19.7~21.2m, 평균적인 판옥선은 크기가 15.2~16.6m였다고 합니다. 배수량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최소 80톤에서 최대 280톤까지 나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층구조인 갑판으로 인해 노를 젓는 격군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 요원은 2층 갑판에서 방해받지 않은 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판옥선과 세키부네

 

일본 세키부네와 가장 큰 차이점은 조선의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반면 왜군의 함대는 대부분 바닥이 V자인 첨저선이었다는 점입니다. 평저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 안정성이 뛰어나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습니다. 영화 한산에서 학익진을 완성 후 선회하여 포격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반면 일본 세키부네는 회전하기 위한 반경이 커서 한참을 돌아야만 회전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 왜군들의 첨저선은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고 주고 삼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함선이 손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규모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기록에서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많아 활을 쏘기에 불편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보아 보통 판옥선의 경우 100명에서 125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편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선장(대장)1명, 신호수 2명, 선박 행정 실무 담당 훈도 1명, 창고 담당 선직 2명, 항해요원 2명, 키를 잡는 타공 2명, 닻줄을 조정하는 요수 2명, 군기와 질서를 잡는 포도장 2명, 활을 쏘는 사부 20명, 화약과 탄 장전을 맞는 화포장 10~14명, 화포 포수 24~26명, 노를 젓는 격군 100~120명이 승선했으며 배가 커지면서 약 200명이 탑승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자총통 천자총통

 

판옥선은 크기에 따라 24문 이상의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으며, 천자총통, 지자총통처럼 대형포를 주로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현자총통이나 불량기포 같은 중소형화포로 전환됩니다.

 

판옥선의 제작에는 가시나무, 참나무,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이용했습니다. 게다가 판옥선은 완전 조립식이라서 남은 부품들을 이용하면 수리가 용이했지요. 못으로 조립한 세키부네에 비해 내구성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키부네는 가벼운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녹나무, 삼나무를 사용한데다가 선체의 구조 자체가 얇아서 내구도가 빈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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