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제 1 선봉장으로 조선을 제일 먼저 침략한 인물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드물게 카톨릭을 믿는 다이묘였고, 가등청정(加藤清正)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조선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지요.
그는 일본 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유지시킬 차세대 유망주로 키우던 젊은 다이묘였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시마즈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고니시 유키나가
1. 상인의 아들
사카이 지방(현재의 고베지역)의 약재 상인 고니시 류사의 둘째 아들로 1555년에(월일 미상) 교토에서 태어납니다.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입니다. 어렸을 적 비젠 후쿠오카의 거상 아베 요시사다 켄로쿠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그가 장사를 하고 있던 지역의 영주 우키타 나오이에게세 재능을 인정받고 무사로 발탁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를 공격하던 중 사자로 히데요시를 만났고 이때 히데요시에게 발탁됩니다. 히데요시 아래에서 수군을 이끌었고 1585년에 셋쓰노카미로 임명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을 하사받아 다이묘가 됩니다. 상인 시절에는 약재를 주로 취급했었지요.
이런 이력 때문에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에게 약장사라는 놀림을 자주 받았습니다. 고니시 역시 가토를 무식한 무장으로 취급하여 서로 악감정이 심했고, 임진왜한 당시 가토보다 먼저 한양을 접수한 건으로 가토를 놀리거나 가토의 패전을 떠들어대기도 하는 등 정말 앙숙중에 앙숙이었습니다.
2.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사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이후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거만한 행동이 없어지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사카에 한센병 요양원을 세우고 고아원 사업에도 힘썼다고 하네요.
그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며 매우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군기로 십자가가 그려진 것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고니시의 부하들 역시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동행했으며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에게도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했고, 기독교가 허용되는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최후의 일본인 정식 사제였습니다. 에도막부시절 기독교/카톨릭에 대한 핍박이 매우 심했었지요. 그의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었다가 에도시절 순교한 기록도 있습니다.
3. 선봉을 자처하다
임진왜란 당시 제 1선봉장으로 조선내에 악명이 자자했던 고니시였지만 사실 그는 임진왜란을 반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에는 자신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조선과의 무역으로 살아가는 점, 자신이 믿는 카톨릭 신앙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했었지요.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수는 없었고, 굳이 전장으로 가겠다면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하게 되지요. 결국 임진왜란 왜군의 선봉장(가토와 동시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침략합니다.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여 부산진, 동래성, 탄금대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제일 먼저 수도 한양을 점령하게 되며 평양까지 진격합니다.
하지만 무리한 진격으로 힘이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이순신 수군의 연전연승, 각지의 의병 및 조선의 반격으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평양에 머무르게 됩니다. 또한 명나라 원군의 등장으로 인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되지요. 이때의 분풀이로 한양에 돌아와 백성들을 모두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양으로 후퇴 후 행주산성에서 3만의 병력을 7차례로 나누어 공격하였으나 권율의 3천 병사에 패하게 됩니다. 이후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나라와 강화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4. 협상에서 사기치다
원래 전쟁에 반대했던 고니시는 전쟁을 끝내고자 명나라 심유경과 정전을 향한 협상에 돌입하게 됩니다. 협상 시작 당시 도요토미는 조선 남쪽 4도(경상,전라,충청,강원도)를 할양하고 명나라 황녀를 천황의 후궁으로 삼으라는 등의 조건을 내걸게 됩니다. 명나라는 일본의 무조건적인 철군과 사과를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심유경은 히데요시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명 조정에 그대로 보고하지 않고 사기를 칩니다. 히데요시가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것을 요구한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명 조정은 히데요시의 항복을 요구하고, 이때 고니시의 지시로 가짜 항복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조안이 명황제를 만나 이를 제출합니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무역은 불가하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또한 조선에서의 철수, 조선과의 화해를 하라는 조건을 내걸고 일본으로 강화사 겸 책봉사를 파견하게 되지요. 그러나 책봉사가 일본으로 넘어가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지만 일본군의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자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이를 듣게된 도요토미는 기존의 조건 대신 3가지의 조건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 조선의 왕자를 데리고 오면 일본의 점령지인 조선의 4개도를 반환
●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소 중 10소를 소각하고 일본군 철수
● 명의 부탁에 의해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람
결국 책봉사가 일본에 도착하고 책봉식이 열리게 됩니다. 책봉식이 끝나고 사절단을 만난 도요토미는, 자신의 조건이었던 조선의 왕자가 일본에 와야 한다는 조건이 실현되지 않았고, 이어진 회담에서 일방적인 철군 요구가 이어지자 격분하게 됩니다. 이에 도요토미는 사신과의 자리를 파하고 다시 전쟁에 돌입합니다. 이것이 정유재란입니다.
사기쳤던 명나라 심유경은 정유재란 발발 후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경남 의령 부근에서 명 장수 양원에게 잡혀 기만죄로 참형에 처해집니다.
5. 이순신을 파직시키다
결국 강화협상은 실패로 마무리되고 다시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때 고니시는 한 가지 일을 벌이게 되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부산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올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지요. 그 후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은 전멸하지요.
여기서 고니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 이순신에 의해 전쟁이 어려워졌으니 일종의 반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
● 정적인 가토 기요마사를 죽일 수 없으니 이순신의 손을 빌려 처리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첫 번째 설이 많이 표현되었지만 두번째도 꽤 개연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애초에 전쟁에 밍기적 거렸으며 반대한 인물이거니와, 화친 실패의 한 원인이기도 했고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가토 기요마사를 말 그대로 조선수군의 손을 빌어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지요. 실제 가토가 상륙하고서 조선측에 아쉬워한 내용이 조선왕조 실록에도 있습니다.
●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나 이 뒤에도 할일이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의 왕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나타낸 표현일 수도 있고, 실제 가토를 죽이지 못해 아쉬워한 발언일수도 있지요. 아무튼 그의 진심이 어쨋건 간에 결국 이순신은 파직되고 조선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렇게 정유재란에 참여하게 되고, 수군을 제외한 12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합니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박살낸 일본은 남원성을 차지하고 전라도를 점령합니다. 그러나 명량에서의 패배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고, 순천왜성에서 농성하다가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가 조선과 싸우는 사이 몰래 도망쳐 무사히 달아나게 됩니다.
6. 최후를 맞이하다
정유재란 종료 후 고니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 세키가하루 전투에 참여합니다. 이 때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지하여 서군에서 도쿠가와의 동군과 치열한 싸움을 펼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병력의 소모가 심하여 겨우 7천정도만 전투에 참여시키게 됩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까지 있었고, 무엇보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지휘를 제대로 못한 점, 3만 병력을 이끈 우키타 히데이에도 무능한 점등이 겹쳐 결국 동군에 의해 서군은 개박살나고 전멸을 다합니다.
고니시도 병력을 거의 다 잃고 후퇴하다가 전장을 이탈한 지 4일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하들에게 잡혀 1600년 11월 16일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했습니다.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았고, 참수를 당하겠다고 했지만 그를 싫어했던 이에야스에 의해 죽기전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온갖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고 맙니다.
심지어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구로나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참수 시 불교승려가 고니시 머리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했는데 고니시는 "나는 신자이다 어디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라고 말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목은 산조 대교에 효수되고 맙니다.
고니시 가문이 완전히 멸문된 뒤, 그의 영토는 라이벌이었던 가토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죽음은 예수회를 통해 서구에까지 알려져 당시 바티칸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한다는 말을 했고, 그의 사후 7년 뒤인 1607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음악극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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