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일본군에 자연재해 수준이었던 이순신, 23전23승 기록 통계, 전사자

cky0214 2023. 12. 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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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전23승 불패의 신화, 다들 아시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님의 해전 기록입니다. 개전 초기 밀리기만 하던 조선군에 한줄기 빛과 같은 승리를 선사함과 동시에 전체 전쟁의 전황을 완전히 뒤바꾸셨지요. 한산해전 이후에 도요토미는 조선수군과의 해전을 금지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왜군은 명량해전 딱 한 번의 해전으로 수륙양용 전략이 무너져 다시 후퇴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순신

 

이처럼 일본군에겐 이순신은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임진,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일본군 피해를 숫자로 정리해 봅니다.

 

 

일본수군 배 함선 세키부네와 안택선 VS 조선수군 판옥선 차이

7년간의 전쟁에서 일본수군은 칠천량을 제외한 해상전에서 한번도 이순신 함대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전술 뿐 아니라 일본수군과 조선군 사이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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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해전 기록


1. 이순신 해전 통계

이순신 장군님의 해전 통계를 살펴보기 앞서 일본 배인 세키부네, 안택선, 조선의 판옥선 규모와 탑승인원에 대한 문서를 참고하여 계산해 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을 참고합니다. 

 

일본수군 배 함선 세키부네와 안택선 VS 조선수군 판옥선 차이

 

위 글에 따라 각 함선 종류에 따른 탑승인원은 아래와 같습니다.

함선 종류 탑승인원
판옥선 130명
세키부네(중) 80명
안택선(대) 150명
고바야부네(소형) 40명

 

 

위 통계를 참고하여 일본수군의 주력함선인 세키부네,안택,고바야부네의 피해 상황을 상정합니다. 기준은 세키부네입니다.

분멸한 왜선의 경우 해당 배의 전사자로 취급합니다. 아래의 통계는 정확한 자료라기 보다는 추정치 임을 참고하여 봐주세요. 

 

음력 해전 조선피해 왜선규모 분멸 왜군 전사자
1592.5.7 옥포 1명부상 50척 26척 2080명
1592.5.8 합포 없음 대5척 5척 750명
1592.5.8 적진포 없음 대11척  11척 1650명
1592.5.29 사천 2명부상 13척 13척 1040명
1592.6.2 당포 없음 대9,중소12척 21척 2070명
1592.6.5 1차당항포 기록없음 대9,중4,소13척 26척 2190명
1592.6.7 율포 기록없음 대5,소2척 3척 380명
  여기까지 전사11부상47      
1592.7.8 한산도 전사3부상10 대36,중24,소12척 59척 9410명
1592.7.10 안골포 전사19부상114 대21척,중15,소6척 20척 2300명
1592.8.29 장림포 없음 대4,소3척 7척 720명
1592.9.1 화준구미 없음 5척 5척 500명
1592.9.1 다대포 없음 7척 7척 700명
1592.9.1 서평포 없음 9척 9척 900명
1592.9.1 절영도 없음 2척 2척 200명
1592.9.1 초량목 없음 대3척 3척 450명
1592.9.1 부산포 전사6부상25 470척, 7만 128척 3800명
1593.2.10 웅포 협선4척 100척 51척 2500명
1593.5.2 2차웅포 없음 불명 불명 불명
1594.3.4 2차당항포 없음 31척 31척 3100명
1594.9.29 1차장문포 없음 불명 2척 200명
1594.10.1 영등포 없음 불명 없음 없음
1594.10.4 2차장문포 없음 불명 없음 없음
1597.2.10 2차부산포 없음 불명 없음 없음
1597.8.27 어란포 기록없음 8척 없음 없음
1597.9.16 벽파진 없음 13척 없음 없음
1597.9.16 명량 전사10 133척 31척 5000명
1598.7.19 절이도 전부상자30 100척 50척 5000명
1598.9.20 장도(왜교성) 전사130 만4천명 30척 3000명
1598.11.19 노량해전 전부상자300 300척 250척 25000명
합계   전사250부상352 1560척 780척 72940명

 

 

실제 일본군 세키부네 및 안택선(아다케)의 탑승인원은 상이 언급한 것 이상이므로 총 일본수군 전사자 72940명 보다 20~30%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단 보수적으로 잡아 저정도 이상의 전사자가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나고야에 모아둔 병력은 예비대까지 합쳐 28만명 수준이며, 이 숫자가 임진왜란(16만), 정유재란(12만)에 거의 투입되었으니 이 중 최소 4분의 1, 많으면 35% 정도가 이순신 수군에 의해서만 사망한 셈입니다. 

 

가히 일본 수군에게는 악몽, 허리케인, 화산 폭발 급 자연재해 수준의 타격을 준 셈이지요. 실제 임진왜란 초기 1년동안 일본군은 육지 및 해상에서 약 10만의 병력을 잃게 되는데(전투,역병,수군) 이중 35% 정도가 바다에서 수장됩니다.

 

단순히 35%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전략인 수륙양용작전 즉 빠르게 북상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바닷길로 보급을 받아 다시 전진하는 큰 그림에서의 전략이 완전히 붕괴되며 평양에서 진격을 멈추고 남하하게 됩니다. 


2. 23전23승이 아니다?

보통 이순신의 해전 기록을 담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교육에서 당시 이순신의 해전 기록을 23전 23승이라 알려졌고 또 그렇게 배웠지만 2012년 연구에서 이와 다른 견해의 논문이 있었습니다.

 

 

해군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의 2012년 논문 "임진왜한 3대 대첩을 통해 본 이순신 전략과 리더쉽" 논문에서, "23전 23승이라는 일반적 주장은 근거가 없다"라며 "세부해전을 살펴본 결과 이순신 장군은 43차례의 해전에 참여했으며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렸다"라고 밝혔습니다. 

 

제장명 교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전횟수는 38승 5무로 공식 승전기록보다 2배정도 많다는 주장이지요. 제장명 교수는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관련 문헌을 분석한 결과 "소설과 드라마등에서 주장한 23전 23승의 근거가 희박하다"며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이 수행한 해전은 모두 47회로 이순신 장군이 참전한 해전은 43회였다"고 밝혔습니다.

 

이 43회의 해전 가운데 이순신은 38번의 해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나 5번은 전과나 피해가 뚜렷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수님은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 요인으로 전선과 무기체계의 우수성을 들었습니다. 특히 사정거리 1km나 되는 조선수군의 지자, 현자, 천자총통 등 대형화포는 일본군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5배 이상으로 승리의 큰 요인이 됐다고 지적하였습니다. 


3. 임진왜란 병력 규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일본 병력 및 조선의 병력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3.1 일본군

기록으로 남은 병력은 임진왜란 당시 파병 17만 + 나고야 예비 11만명이었습니다. 아무리 대한해협이 좁다고는 하나 17만을 상륙시킨 건 당시 지구 어디에도 없던 파병 규모입니다. 16세기 후반 28만이라는 대군을 실전에 투입가능한 국가는 명나라와 무굴 제국 외에는 없었지요. 16세기 지중해 세계 최강이었던 오스만 튀르크가 전 병력을 동원해도 15만을 넘지 못했습니다. 

 

조선파병 170,850명 + 예비군 117860명 = 288710명 이상

 

동원선박 2100척 이상

 

초기 조선에 파병된 자세한 편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1군 - 큐슈서부세력, 18700명 (제1선봉,평안도 정벌군) 고니시 유키나가

 

제 2군 - 큐슈중부세력, 22800명 (제1선봉, 함경도 정벌군) 가토 기요마사

 

● 제 3군 - 규슈동부세력, 11000명 (황해도 정벌군) 구로다 나가마사

 

제 4군 - 규슈남부세력, 17000명 (강원도 정벌군) - 시마즈 요시히로

 

● 제 5군 - 시코쿠세력, 24700명 (충청도 정벌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

 

● 제 6군 - 큐슈북부세력, 15700명 (전라도 정벌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제 7군 - 주코쿠서쪽세력, 30000명 (경상도 정벌군) - 모리 데루모토

 

● 제 8군 - 주코구동쪽세력, 10000명 - 우키타 히데이에

 

● 제 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 도요토미 히데카츠

 

● 수군 - 9450명

 

합계 : 170,850 명

 

 

수군에는 쿠키 요시타카,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이 장수로 참여합니다. 

 

추가로 후속 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 있습니다. 파병된 1~9군은 주로 일본 서쪽 큐슈지방 중심의 다이묘이며 10~16군의 예비군은 동부 쪽(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다이묘입니다. 

 

예비군 합계: 117,860 명

 

3.2 정유재란 병력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의 협상 장난질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8월 27일 총 14만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입니다. 조선은 하삼도를 청야하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수군으로 배후를 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의 파직과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순식간에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북상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정유재란에 동원된 일본군은 수군을 제외하고 총 121,100명입니다.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제2군 - 가토기요마사 10000명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제4군 - 나베시마 나오시게 - 12000명

제5군 - 시마즈 요시히로 - 10000명

제6군 - 쵸소카베 모토치가 - 13300명

제7군 - 하치스카 이애마사 - 11100명

제8군 - 우키타 히데이에 - 40000명

 

3.3 조선군 병력

부산 동래성 전투 같은 초기에는 중과부적으로 패한 전투들이나 행주대첩 등 소수 조선군이 다수 일본군을 이긴 전투들 탓에 항상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 편제를 살펴보면 물량은 절대 적지 않았지요. 실록에서 나온 전투들을 살펴봐도 초기 조선군의 병력을 다 합치면 10만이 넘어갑니다.

 

- 부산진, 동래성에서 전멸한 조선군 3000명

- 상주전투 1000명

- 탄금대 전투 8000명 이상

- 용인전투 경상,충청,전라 3도 근왕군 50000명

- 평양방어전 3000명

- 이순신의 3도 수군 10000명

- 강원도, 함경도에서 가토에게 패한 조선군

- 진주성 및 전라도 남부지방

- 선조 호위부대 1만

 

대충 위와 같이 초기 병력이 정리되는데 이것만 합해도 10만 이상입니다. 그리고 선조실록에 나온 집계로도 임진년 초기 조선이 동원한 병력은 14만명이 넘습니다. 물론 이 병력은 평소에는 농민이고 전시에는 전투에 투입되는 전문적인 전투병은 아닌 것이 함정이긴 하죠. 

 

 

조선왕조 실록에 나온 병력 규모는 아래와 같습니다. 임진년 1년 후 1593년 1월 조선군의 병력이 사료에 남아있는데 이는 실제 운용중이던 병력 규모입니다(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1593년) 1월 11일 병인 15번째 기사)

 

경기도 - 19300명

충청도 - 10800명

경상도 - 77000명

전라도 - 25000명

함경도 - 10200명

강원도 - 2000명

평안도 - 17903명

황해도 - 88300명

 

합계 : 172,400명

 

위에서 언급한대로 양적으로는 조선의 병력이 상당했지만, 이 병력들은 질적으로 좋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일본군은 10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경험한 정예중에 정예군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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