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명나라 만력제는 진린으로 하여금 수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돕도록 합니다. 연합함대 구성 초반 통제사 이순신과 작은 갈등을 빚지만 이내 통제사의 인품과 능력에 반해 진심으로 존경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함께 싸우게 되는 인물이지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그가 권위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 그의 성격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번 post에서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 장군에 대해 알아봅니다. 같이 조선으로 파병되었던 등자룡 장군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진린 제독
1. 한국 광동 진씨의 시조
진린 제독에 대해 알아보기전에 재미있는 사실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post에서 살펴볼 명나라 진린 장군은 현재 대한민국 광동 진씨의 조상입니다.
그의 손자인 진영소(陳泳素)가 명나라에서 감국수위사로 근무 중 명나라가 1644년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애산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라고 말하며 식솔들을 데리고 조선 남해안 고금도를 거쳐 해남에 정착해 1644년 8월 조선에 귀화하게 됩니다. 그 후 진영소의 후손들은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 진씨가 됩니다. 즉, 진린 장군의 직계 후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명청 교체기에 이런식으로 조선에 귀하한 명나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현재 해남에 정착한 광동 진씨의 집성촌을 "황조리"라고 하며 진린을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가 있습니다. 2013년 3월에 한국의 진린 후손이 광동으로 가서 중국의 진린 후손과 같이 제례를 올리고 온적이 있다고 하며 꾸준히 교류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 이순신 장군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광동 진씨는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와의 교류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5년 기준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광동 진씨는 2397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 무관으로 공을 세우다
진린은 1543년 2월 15일 광동성 소주부 웅원현 용전포에서 진본림의 4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납니다. 1562년 20세의 나이로 명나라 관직에 출사한 후 곧바로 공을 세우게 되는데요.
임관한 그 해, 광동성 조주와 영덕 등지에서 수만 명의 평민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광동수비(廣東守備)자리로 승진하게 됩니다. 도적 뇌원작을 토벌하였고 영동의 많은 도적들도 무찌르면서 공적을 쌓게 됩니다.
이후 황제가 바뀌어 만력제가 즉위하고 광동성 고요와 게양 및 산인 종월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공을 세웁니다. 진린은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무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남방 평정에서 많은 공을 세우게 되지요. 이러한 공으로 만력제 5년(1575년), 광동도사첨서서 도지휘첨사에 임명되었고, 이성립이 도적을 평정하기 위해 제양보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후임으로 명을 받아 이를 평정하여 광동조경유격장군, 고주참장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1577년 묘족을 정벌한 공으로 부총병으로 부임하여 동안첨장사가 되었지만 묘족 중 살아남은 자가 백성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 이일로 죄를 얻었으나 석우 및 청수의 여러 망루를 접수하여 3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러나 1583년 4월, 토목공사를 실시해 영채, 관성, 사당 등을 지었는데 재물을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자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현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나응학에 의해 탄핵당하게 되고 관직 박탈되었다가 적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다시 죄가 사해져 낭산 부총병이 됩니다. 이런일이 자주 있자 1584년 이후 조정의 신료들은 더이상 진린을 신뢰하지 않았고 진린은 파직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진린은 결국 1584년 이후 8년간 야인생활을 했으며, 복직이 된 것은 누루하치의 후금이 반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외우내환으로 어지럽자 병법에 능한 진린이 필요해서입니다. 명황제는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진린을 불러들여 부총병(종2품)에 이어 전군도독부 도독에 임명합니다.
3. 정유재란 참전
명나라 조정은 1597년 12월 제 3차 동정군 경리 양호 장군이 울산성 함락에 실패하자 왜란을 종결하기 위한 장군을 물색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왜구방어와 수전에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청렴하고 강력한 진린이 적임자라 추천되어 추가파병군의 수장으로 임명됩니다. 흠차총령수병어왜총병 관전도독부로 임명하고 수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지요.
진린은 본영 수군 5000명, 전함 500척, 해병 및 보병 1만 3900명과 포루투갈 해군 등 도합 2만명, 그리고 등자룡을 부총병으로 삼아 각종 포와 군량미 2만석을 싣고 조선으로 향합니다. 1598년 6월26일 선조와 만난후 7월 16일 고금도에 도착해 묘당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이후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1598년 11월 19일까지 5개월동안 이순신과 함꼐 합니다.
최우의 결전인 노량해전 당시 명군은 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일본으로 내쫓는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기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퇴각하는 일본군을 그냥 보내주라는 지령을 받았고,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왜군과의 전투를 잠시 주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린은 본인의 성격도 강경파였고, 같이 군을 지휘한 이순신에 대한 존경감, 자신을 구해준 일이 있어 이순신과 함께 마지막 전투에 나서게 되지요.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은 그전까지의 포격전과 달리 관음포에 포위된 일본군을 향해 전면으로 돌격하였고 치열한 난전이 벌어집니다. 같이 공격에 나선 진린과 부장 등자룡이 탑승한 판옥선이 포위당한 이순신을 돕기도 했지만 곧이어 다수의 일본함선에 포위되었고, 등자룡은 구출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합니다. 이순신은 포위된 진린을 구하다가 총상을 입어 전사하게 됩니다.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곧바로 이순신을 찾아가 전투 중에 자신을 구해준 데 대해 사례하려고 했으나 이미 통제공 이순신은 전사하고 난 후였습니다. 진린은 이때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꼐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라며 통곡과 눈물을 흘렸고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진린은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운구하여 이순신의 고향 아산을 찾아갔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노량해전이 끝난 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남해왜성을 공격하여 왜적 2000명을 죽이면서 이 기나긴 7년 전쟁을 직접 마무리 하게 됩니다. 종전 후 그는 대마도를 쳐 조선의 영토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이 겁을 먹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전해집니다.
전쟁이 끝난 후 1599년 음력 1월 10일 고금도 도독부 앞뜰에서 영결식을 가졌으며 83일동안 월송대에 시신을 아치하고 장례기간을 가집니다.
4. 이순신에게 반하다
이순신과 합류한 진린은 초반 상국이라는 허세를 부리며 지휘부의 주도권을 잡고자 이순신을 모질게 대했고 조정에서도 이를 매우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말에 즉시 군대를 동원해 고기와 생선 등을 푸짐하게 차리고 진린 뿐만 아니라 모든 명군의 장병들까지 배부르고 취하게 하여 인심을 샀고, 섬에 왜구가 왔다는 말에 그 수급 40개를 모두 진린에게 바쳐 공을 돌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렇듯 무례하게 굴었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고 바로 옆에서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을 겪으면서 그에게 감복하게 됩니다.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반한 진린은 최고의 찬사를 했을 뿐 아니라 2살 어린 이순신 장군을 어르신 호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입니다. 또한 선조의 질투심으로 이순신이 조선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알고, 함께 명나라로 가서 능력을 펼쳐보이자 제안하기도 합니다.
노량에서의 전투가 있기전 어느날 밤하늘을 살펴보다가 별의 흔들림을 보고는 이순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제갈량의 고사를 따라 제단을 쌓아 기도를 올려 수명을 늘려보라 간곡히 청하기도 하였지요. 물론 이순신은 자신이 제갈량보다 못하다 말하며 주저하였지요. 제갈량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사람들 입장에서는 대 현인인데 이순신을 제갈량에 견줄 정도로 인정하고 호평한 것이지요.
5. 귀국 및 사후
명나라로 귀국한 후 임진왜란의 공적으로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되었고 광동백에 봉해졌으며, 1605년에는 신첨장관사로 옮겨 산묘를 토벌하였으며 광동성을 진무하고 관직을 마치게 됩니다. 파주를 평정한 공으로 좌도독을 더하면서 지휘사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 세상을 뜨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충강으로 추증됩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그의 자손들도 명나라에 충성을 바쳐 싸우는데, 그가 살아있는 시대가 명청교체기였고 내부적으로는 이자성의 난까지 일어나 아주 극심한 혼란기였습니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1646년 나라의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싸웠고 결국 전사합니다. 진린의 손자이자 진구경의 아들이었던 진영소는 감국수위사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결국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해남땅에서 광동 진씨로서 조선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며 지금까지도 진린의 직계 후손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이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