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화장실 청소부 원숭이에서 권력정점에 서다, 전쟁광 도요토미 히데요시

cky0214 2023. 12. 16.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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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치욕을 안겨준 전쟁 원흉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자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명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정복하려고 했던 미친 전쟁광이었죠. 우리에게는 원수와도 같은 사람이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로 인정 받는다고 합니다. 

 

풍신수길

 

이번 post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일본 사천왜성의 귀신 귀석만자 시마즈 요시히로, 공포의 대상이 되다

시마즈 요시히로, 그는 정유재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인물로만 알고 계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량해전이 있기전 사천왜성 싸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4만명의 조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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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1. 미천한 출생

풍신수길은 1537년 3월 17일, 일본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서 아시가루(하급보병)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시대가 전국시대인만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냥 농민출신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은 상황이지요.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평민 출신임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누나 닛슈니, 동생 히데나가와 아사히히메 그리고 풍신수길이 평생같이 효도를 한 어미니 오만도코로 나카등이 있고 친가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유력 인사가 된 후에도 출신 신분이 천해서 정이대장군(일본 쇼군, 천황 바로 다음 서열)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씨(일본 대표성씨들)에 해당되는 성씨만이 정이대장군의 자격이 있었지요.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정이대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야키에게 자신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부탁을 한적도 있습니다. 물론 거절당했지요. 

 

 

이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정이대장군이란 뜻이 외국을 토벌한 장군이라하여, 이 자격을 얻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이대장군이 되지 못한 히데요시는 일단 태합에 취임하여 전국을 지배하는데 이 태합은 현재의 국무총리격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재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될 수 있었는데, 도쿠가와는 미나모토씨 중 하나인 세이와 겐지의 후손임을 칭할 수 있는 다이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2. 여러번 바꾼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렸을 적부터 출세할 때까지 이름을 여러번 바꾸게 됩니다. 어렸을 적 아명은 고자루(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였고,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로 개명하였고, 오미국을 정복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의 관직을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로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 관백이 되면서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지요.

 

 

이에 더해서 후지와라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라는 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겐지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 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이유때문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서는 "평수길" 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3. 오다노부나가를 모시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가하여 새아버지와 살다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를 따르며 무예와 학문, 그리고 병법을 배웠으나 곧 그를 떠나 18세의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됩니다.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는데 담당하는 일마다 맛깔나게 일을 처리하여 노부나가의 눈에 띄게 됩니다.

 

오다노부나가

 

노부나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요, 추운 겨울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속에 품어 따뜻하게 하여 전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한 시장에서 뭔가를 사라고 시키면 히데요시는 다른 가신들과는 달리 좋은 물건을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흡족해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때 자기 사비를 더 들여 비싼 것을 사온 것이었다고 하네요.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사로(일본말 원숭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히데요시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언제나 빠르게 달려왔다고 하지요.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이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아래 동영상).

 

히데요시 원숭이

 

1570년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부하의 배신으로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를 자청하여 퇴각길을 열어준 공을 세웠고, 1573년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습니다. 아자이 나가마사가 죽은 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군 18만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게 되는데 이때 하시바라는 성으로 고칩니다. 

 

1575년에 나가시노 전투에 참여했고, 1576년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을 했으나 의견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하고 오다군이 대패하는 바람에 노부나가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겨우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격하여 이깁니다. 이후 주고쿠 지역 공격에 참여하여 1579년까지 마츠바라, 벳쇼,고데라 등을 항복시키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1581년부터 모리 공략에 나서 대 활약을 하게 되며, 특히 다카마쓰 성을 공략할 때 수공을 통해 성을 물바다로 만들어 항복을 받아낸 이른바 "다카마쓰 수공" 작전을 피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가장 유명한 일화이지요(위 동영상 참고).

 

다카마쓰 수공


4. 천하를 손아귀에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배반당해 할복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혼노지의 변입니다. 수공을 통해 다카마쓰 성을 공격중이었던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만 할복하고 더이상 진군을 멈추고 모리측과 급하게 화친합니다. 주군이 있던 교토로 황급히 돌아가게 되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이라 하지요. 주군을 살해한 아케치를 제압하면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결정환 회군입니다.

 

혼노지의 변

 

6월 6일에 다카마쓰성을 출발하여 7일 밤낮으로 달려 도쿄에 도착하는데 그 속도가 가히 무서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씨 속에서도 70km를 30시간 만에 돌파한 구간도 있다고 합니다. 

 

주고쿠 대회군

 

장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식량을 휴대하지 않았고, 혼노지에서의 변을 듣고 퇴각할 때 미리 발이 빠른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나게 될 길목에 위치한 마을마다 돈을 주고 병사들이 지날 때 바로 식사와 신발을 갈아신을 수 있도록 조치했기에 가능한 속도였지요. 6월 13일 교토 인근의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를 격파하고 교토로 진입합니다.

 

 

오다 가문은 몇개의 파벌로 나뉘는데 일단 주도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오나 노부나가의 손자(오다 히데노부, 아들은 노부나가와 같이 사망)인 산보시를 옹립하여 주군으로 옹립합니다. 

 

이에 반기를 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심이 된 오다측 군에게 연패하였고 결국 히데요시가 직접 전선에 나서 오다 노부카츠와 강화를 하게되고 전쟁은 끝납니다. 전쟁으로 이기진 못했지만 이미 정국은 정치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그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 측으로 귀순하게 되면서 오다측 가문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노부카츠는 결국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나게 되지요.

 

정국을 일거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 히데요시는 1584년 10월 중순에 종오위하 사콘에노곤쇼쇼(근위부의 차관급), 11월에는 곤노다이나곤(태정관의 차관급)으로 임명됩니다. 명실공히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됩니다.


5. 천하통일

1584년 오사카 성을 쌓았고 이듬해 1585년 3월에는 정이위 나이다이진에 임관됩니다. 3월 21일에는 토도 다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공격하게 하여 평정하였고 시고쿠의 쵸소카베를 정벌하여 7월에 마무리합니다. 

 

 

이 때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라 관백을 칭했는데, 원래 일본에서는 쇼군이 될 수 있는 가문이 정해져 있는데다가 출신이 평민이었기 때문에 쇼군에 취임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 대신 관백에 취임하게 됩니다. 관백 역시 일정정도의 신분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관백직을 수여받습니다. 

 

일본 쇼군

 

1586년 관백이 된 뒤 오오기마치 덴노 천황에게 씨로는 도요토미를, 성으로서 아손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을 칭하게 되었고 10월에슨 총무사령을 선언하며 다이묘끼리의 사사로운 전투를 금지시킵니다. 12월 25일에는 타이죠다이신 태정대신으로 임명됩니다. 태정대신은 조정 최고위 관직으로 조정 및 일본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권력자가 됩니다. 

 

1587년 20만의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가문을 복속시켰으며, 같은 해 교토에 주라쿠다이 대 저택을 건축하여 천황을 초청하기도 합니다. 이해에 전국에 해적 금지 및 칼사냥 금지령을 내립니다. 규슈일대의 기독교도들의 횡포를 목격하고 바테렌 추방령을 내려 기독교,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1588년 명목상의 허울뿐인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사임합니다. 후임이 없어 이후 도쿠아와 이에야스가 쇼군으로 취임하기까지 15년간 공석이 되지요. 

 

1589년 후첩 요도도노로부터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얻습니다(3년만에 사망). 1590년 간토 지방의 실력자 호조 우지마사가 사나다 가의 영지를 무단으로 침범했다는 이유로 호조 정벌을 일으켜 22만 대군으로 오다와라성을 포위 공격,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성을 3개월만에 항복시킵니다. 포위하던 중 다테 등 토호구의 다이묘들도 항복의 의사를 보내와 이 시점에서 전국이 통일되게 됩니다. 

 

오다와라성 포위

 

사망한 아들 츠루마츠 대신 1591년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관백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타이코,전 관백을 칭하는 말)을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포합니다.


6. 임진왜란을 일으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여러 설이 있지만,

 

- 미천한 출신으로 관백에 오른만큼 정복군주로서 정당성을 얻고자 함.

- 3살 아들(츠루마츠)의 죽음으로 노망설

- 오다노부나가의 대륙진출에서 영향(조공무역), 히데요시가 1585년부터 운운함

- 미치광이 전쟁광, 망상에 사로잡힘

- 통일된지 얼마 안되 유력 다이묘들의 불만과 세력을 잠재울 필요가 있음 

 

정도가 있으나, 한국에서는 제일 마지막 이유를 주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히데요시는 조선에 보낸 오만방자한 국서외에도, 필리핀, 태국, 대만, 오키나와(류큐국) 왕국에도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보내고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 편으로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령 고아에 인도까지 점령할테니 거기서 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도 합니다. 지금봐도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일로 주변국들의 공공의 적이 되지요. 또한 100년동안의 내전, 전국시대의 싸움으로 다이묘들과 백성들도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히데요시의 원정을 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같은 경우 조선과의 무역으로 먹고살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왜변등으로 일본 세견선의 수가 줄어든 상태였고, 서일본 쪽 다이묘들 입장에서도 조선과의 무역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소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이자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격하게 반대한 것이나 정유재란이후 국서를 위조하여 전쟁을 끝내려는 노력을 했던 것을 봐서도 내부에서의 반발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통일한지 얼마 안되 지배력이 아직 완전치 못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힘있는 다이묘들을 통치가 힘든 지역으로 전봉시키고 숙청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중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일개 군 사령관으로는 훌륭하지만 국가를 통치하고 경영을 해나가는 능력은 매우 부족했고, 계속 통치하려면 결국 전쟁지휘관 스타일로밖에 불가능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일으켜 또다시 전쟁 지휘관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결국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대로 하고 우키다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정군이 꾸려서 16만 대군이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을 침공합니다. 나고야의 예비대까지 계산하면 총 28만 대군이었지요.


7. 전쟁의 장기화

조선의 준비 미흡과 200년동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고 기강이 헤이헤진 개전 초기에 파죽지세로 진격을 합니다. 평양과 함경도까지 빠르게 진격을 감행했지만 선조의 몽진과 너무 빨리 진격하여 보급로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점, 명의 원군, 각 지역의 의병들로 인해 서서히 전쟁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자연재해급의 피해를 보게 되는데.. 바로 이순신의 등장입니다. 바다로의 보급이 어려워진 일본은 전방에서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되지요. 모든 조건이 불리해져 가는와중 처음 침공한 16만 중 10만이 개전 1년만에 없어지는 대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에 일본군은 나고야의 예비대를 급하게 투입하고 남해안을 요새화하여 장기전에 돌입합니다. 동시에 강화협상에 돌입하지요.

 

이순신

 

협상당시 히데요시의 미친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할양한다.

-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조건들을 들어줄리 만무했고, 또한 중간에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탓에 히데요시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는데,

 

-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데려오면 조선영토를 반환한다.

- 왕자가 고니시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은 철수한다.

- 명나라 칙사가 책봉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소요시토시 대마도주

 

결국 명나라 책봉사가 일본으로 오고, 책봉식까지 거행하지만 나머지 요구사항들은 위에서 예기한 고니시의 농간으로 모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전쟁은 다시 시작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시는 바와 같이 이미 정비를 어느정도 하고 있던 조선과, 10만에 가까운 원병을 파병한 명나라군, 이순신의 해상 장악으로 인해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8. 그의 죽음과 멸문

1598년에 히데요시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9월 18일 후시미 성에서 사망합니다. 사망하기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 앞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부탁하고 숨을 거둡니다. 대신들과 다이묘들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수를 명령합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이 유명한데요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위함, 결핵, 독살 등의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표면위로 올라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은 이에야스에 넘어가고 도요토미 가문은 65만석의 다이묘로 전락하게 되지요.

 

세키가하라 전투

 

1615년 호코지 종명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킵니다. 이 일로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스스로 죽었으며 손자 쿠니마츠는 숨어있다가 사로잡히지요. 결국 살해당하고 히데요시의 대는 끊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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