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일본 사천왜성의 귀신 귀석만자 시마즈 요시히로, 공포의 대상이 되다

cky0214 2023. 12. 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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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 그는 정유재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인물로만 알고 계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량해전이 있기전 사천왜성 싸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4만명의 조명연합군에게 크게 이겨 공포의 대상으로 불렸던 인물이며, 그 이전 일본 전국시대에서도 크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박학다식하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이었으며, 아랫사람에게 따뜻하고 가족애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님을 전사시킨 인물이어서 그런지 쉽게 애정이 가거나 그렇지는 않네요.

 

이번 post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등자룡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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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


1. 사쓰마 번 당주가 되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 번 시마즈가 제 17대 당주이며,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1535년 7월 23일(음력) 태어납니다. 원래 이름은 타다히라였으나 나중에 정이대장군에 오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 중 한 글자를 하사받고 요시타가로 바꿨다가 요시히로로 바꿨습니다. 그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와 함께 19살때부터 전장을 누볐으며 이와쓰루기 공략전에 첫 출전을 하게 되지요.

 

큐슈

 

시마즈 요시히로

 

1557년 오스미 지방의 호족 가모씨 토벌전에서 처음 적의 수급을 베었고 승리하였지만 화살 5발을 맞는 중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 큐슈지방의 통일을 위한 전쟁에 계속 참여합니다. 

 

 

1577년 시마즈는 현재의 미야자키현이 휴가 지방을 공격하여 휴가의 다이묘인 이토 요시스케를 물리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이토 요시스케가 큐슈 북부의 오토모 소린에게 망명합니다. 규슈 남부 지방을 제패하게 되지요. 1578년 미미카와 전투를 진두 지휘하여 분고 방면에서 쳐들어온 큐슈 북부의 강자 오토모 소린을 격퇴합니다. 

 

오토모 소린

 

이후 1586년까지 큐슈 통일을 거의 완성해 가던 시점에 궁지에 몰린 오토모 소린은 혼슈를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상황은 돌변합니다. 이 사실을 안 시마즈는 도요토미군이 오기전에 큐슈를 통일할 생각으로 오토모를 총공격하지만 오토모군의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으로 통일에는 실패합니다.

 

 

1587년 음력 4월 17일, 드디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10만 연합큐슈 원군과 네시로자카 언덕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가 이끄는 토요토미군과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혼슈를 장악한 토요토미의 군대는 일단 체급부터 차이가 너무 났습니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는 총대장이었음에도 직접 칼을 뽑아들고 싸워야 했을 정도로 전황은 어려웠고, 분전했으나 결국 대패하게 됩니다. 겨우 얻은 큐슈의 땅들을 거의 다 토해내고 큐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게 되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형 요시히사가 당주를 포기하고 출가합니다. 스님이 된 형의 후임으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 17대 당주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형이 시마즈씨 집안의 정치 군사적 실권을 계속 쥐고 있어 이름뿐인 당주였다고 하네요. 이는 도요토미의 계략으로, 요시히로를 당주를 임명함으로써 실권을 쥐고 있던 형 요시히사와 권력다툼을 하길 바랬으나, 죽을 때까지 둘은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2. 임진왜란에 참전하다

도요토미에게 패한 후 당주가 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요토미 정권에 협력적인 자세로 전향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까지 조선에서 전투를 수행하게 됩니다. 전쟁 준비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1만군의 차출을 명령받았으나 사쓰마 번의 내부 모순 등으로 인한 농민 봉기로 만명을 다 동원하지 못했고 참전 기일도 크게 넘기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 4번대 총대장 모리 가쓰노부 밑으로 배속되어 험한 강원도로 진군해야 했고, 1593년 9월에는 후계자 히사야스를 풍토병으로 잃게 됩니다.

 

 

일본 원정군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동원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10일간의 혈투끝에 성을 함락시킵니다. 

 

2차 진주성전투

 

1597년 정유재란 때 그는 도도 다카도라의 수군에 배속되어 칠천량해전을 치루게 되지요. 음력 8월에는 남원성 전투를 지휘했으며, 충남 부여까지 북상했다가 명량에서 대패한 수군 덕에 다시 남하하여 전남 해남에 도착합니다. 그 후 음력 10월 말에는 경남 사천 방어에 투입돼어 성까지 지었고(사천왜성) 이 과정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3. 사천왜성의 귀신과 노량해전

1598년 사천 방어를 위해 성을 축조하고 농성에 들어갑니다. 9월에 사천왜성으로 조명연합군 3만명이 공격해 들어오게 되는데 시마즈는 약 7000~10000명의 병력으로 처들어온 조명 연합군을 대파합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 보고에 의하면 명군 약 7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부상자는 수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대패를 한 것이지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 조차 전대미문의 대승리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시마즈 측도 피해가 컸지요. 차남이자 가문의 후계자 시마즈 히사야스가 전사하고 많은 병졸들이 사망합니다. 

 

사천왜성

 

이 때의 승리로 명나라에서 "귀석만자"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의 사망 후 전군에 본국 후퇴령이 내려닙니다. 음력 12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5백척의 함대가 출동하였으나, 노량해전에서 조명 연합함대와 야간 해전을 벌이게 되고 관음포에서 포위공격을 당해 겨우 50척만 살아남는 대패를 하게 되지요. 다만 여기서 고니시가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군의 본국 퇴로 확보라는 전략적 목표만은 달성하게 됩니다. 이 때의 공으로 시마즈는 영지를 넓히게 됩니다.

 

노량해전

 

난중 잡록 등에 의하면 이순신을 저격한 부대는 시마즈의 조총병 부대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4. 도자기 전쟁

시마즈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은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간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특히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울 정도였지요. 당시 일본에서 차를 즐겨 마시는 문화가 유행했는데, 이 때 조선의 도자기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고 하지요. 조선 도자기는 다이묘들에게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시마즈는 일본으로 후퇴하며서 전라도 남원성에서 박평의, 심당길등을 비롯한 80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습니다. 특히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 3대 도자기이자 세계도자기의 명품으로 유명한 사쓰마 도자기(Satzuma Ware)를 굽는 심수관가라고 불립니다.

 

조선도자기

 

박평의 또한 도공으로 대대손손 일본에서 도자기 산업에 전념합니다. 1886년 12대손 박수승부터 도고가문의 족보를 구매하여 개성하였고, 여기서 웃긴 사실은 그의 아들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케노리란 사실입니다. 한국명은 도고 시게노리입니다. 이때부터 가업이 정치가 됩니다.


 

5. 세키가하라 전투

귀국한지 2년(1600)만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리를 놓고 다툼이 시작된 것이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시한 동군에 대항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와 모리 데루모토의 서군에 시마즈가 가담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 고작 천 5백명의 병력만 끌고와 초반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지요.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배신으로 도쿠가와의 동군에게 승기가 기울고 시마즈는 결국 탈출해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때 정말 과감한 선택을 하는데, 철수를 위해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철수합니다. 자신의 전투력을 믿었던 걸까요. 노량해전 관음포에서도 비슷한 철수 작전을 썼었는데, 포위를 뚫기 위해 적 대장선으로 정면 돌격하는 과감함을 보였었습니다. 

 

세기하가라 전투

 

그러나 당연히 이러한 무모한 시도로 1500명의 병사중 300명만이 살아남았고, 추격받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시마즈 군은 80명만 살아남게 됩니다. 

 

결국 도쿠가와의 승리로 에도 막부가 시작되자 시마즈는 이이 나오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통해 에도막부와 화해를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군비를 증강합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을 토벌군으로 보내지만 시마즈는 이를 모두 물리쳤고 도쿠가와도 결국 포기합니다.

 

세기하가라

 

1602년 강화가 체결되어 쇼군인 도쿠가와에게 아들 다다쓰네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영지를 보존받았고 시마즈 집안은 대대로 에도시대에 유력 다이묘로서 계속됩니다. 

 

이후 1619년까지 살다 오스미 가지키에서 향년 85세로 숨을 거둡니다. 

 


6. 시마즈의 일화

전쟁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굉장한 애처가로 가정적이고 인정미가 넘치는 성격이었으며 조선에 주둔하는 와중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3년이나 조선의 진중에서 고생한 것도 시마즈의 집이나 아이들을 위해서였소. 하지만 만약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소. 당신에게는 많은 아이가 있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강하게 살아주기 바라오. 그렇게 해주는 것이 불경 1만 부를 읊어 주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오"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명나라의 허의후에게서 배운 의술 뿐 아니라 다도와 학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문화인이었고, 가신을 소중히 여겨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고 때로는 병졸과 함께 불을 쬐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겨울철이면 많은 병사가 얼어죽었는데 시마즈군에서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며, 사후에 순사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명의 가신이 그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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