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영화와는 많이 달랐던 실제 임진왜란 웅치 전투의 진실

cky0214 2023. 12. 30.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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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에서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일본군이 웅치를 지키던 조선군에 패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견내량에 매복해있던 와키자카는 웅치 공격이 시작되는 시간에 한산으로 진출을 시도하지요.

 

영화 막바지에 지원군의 합류로 조선의 승리로 표현되는데요, 이는 실제와 다릅니다.

 

웅치전투

 

이번 post에서는 웅치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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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치전투


1. 웅치의 위치

웅치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은 현재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이며 전주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웅치

 

임진왜란 발발 3개월 후인 1592년 7월(음력), 일본군 제6군 고바야카와는 한양에서 내려와 금산에 진을 치고 전라도 공략을 시작하며,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라도 입구인 전주성을 치려합니다.

 

 

 

이 웅치고개(곰티재)는 전주성으로 최단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고개였지만 산세가 험하고 길이 좁아 오히려 수비하기가 용이한 지역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웅치는 이치에 비해 완전히 산길이지요.

 

웅치전투

 

이 시기에 웅치와 이치에서 전투가 치뤄지는데, 이치전투는 권율이 치뤄내는 전투로 행주대첩에 비교될만한 대승이었지만 웅치전투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 목표는 전라도!

한양을 단 20일만에 함락한 일본군은 애시당초 전쟁이 1차 목적이었던 선조를 잡는 것에 실패하자 장기전을 고민하게 됩니다.

 

각 군의 장수들을 모아 임진강에서 회의를 진행한 일본군은 조선 전체를 분할통치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게 됩니다.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는 원래의 계획대로 각각 황해도, 함경도 지방으로 진출하고 나머지 군은 조선 전국으로 전장을 확대합니다.

 

 

이에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한양을 출발해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금산을 공격하게 되고 6월22일 금산의 제원에 도달하여 조선군과 교전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금산 군수 권종이 전사하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 결국 6월23일 금산성이 함락되고 맙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의 6군은 추가로 진안과 용담을 함락하고 전라도의 대문인 전주성을 향해 남하합니다. 무주에 왜군이 나타나자 팔량치를 지키던 이유의 노종령, 육십령을 지키던 이계정이 모두 도망가고, 남원부사 윤안성도 남원성을 버리고 달아나지요.

 

이렇게 허무하게 조선군이 밀리게되고 결국 용담에서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웅치고개만이 남게되며,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웅치를 공격한 일본의 장수는 고바야카와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이며 1만의 대병을 이끌고 출진하게되며, 이에 대항한 조선군은 관군, 의병 1000명이 모여 방어진을 세우게 됩니다.

 

웅치전투

 


3. 장렬히 전사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조선군은 제1방어선인 산 아래에는 의병장 황박을 배치했고, 제2방어선인 산 중턱에는 나주판관 이복남을 배치, 최종방어선인 산 정상에는 김제군수 정담이 배치됩니다.

 

웅치

 

왜군은 7월7일 새벽 어둠을 틈타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한 번은 막아냅니다.

 

그러나 해가 뜨고 본격적인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1선의 황박은 물러서게 됩니다. 

 

2선의 이복남 군이 나서 싸웠지만 이 역시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되며, 이에따라 산 정상에서 정담군의 최후의 혈전이 시작됩니다. 

 

지휘관 정담이 직접 활을 쏴서 적장을 맞힐 정도로 매우 치열한 혈전중의 혈전이 진행됩니다. 

 

웅치전투

 

산을 올라가려는 일본의 대군에 맞서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해가 저물때까지 계속됩니다. 산 아래에서 올라가며 싸우는 일본군으로서는 피해가 컸고 체력이 떨어지자 일단 퇴각합니다.

 

그러나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을 알게된 왜군은 밤을 이용해 다시 공격을 시작하게 되고, 중과부적으로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없었던 조선군은 최선을 다해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치열한 전투속에 정담, 강운, 박형길등이 전사하게 되면서 웅치고개는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복남이 이끄는 나주관군은 안덕원까지 퇴각했고, 피하지 못한 위 장수들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4. 안덕원 반격

다음날인 7월8일 웅치고개를 점령한 왜군은 산처럼 쌓인 조선군의 시체를 뒤로하고 전주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합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주판관 이복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전주성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안덕원은 현재의 전주시 산정동과 금상동 일대입니다.

 

 

때마침 귀환 명령을 받고 북상중이던 황진의 군사가 합류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게 되며, 전날 웅치에서 체력을 소모한 왜군은 이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복남군은 안덕원 계곡에 매복하고 있다가, 골짜기로 들어온 안코쿠지 에케이 부대의 1개 진을 몰살시키기도 했지요.

 

결국 왜군은 물러나게되고, 한숨을 돌린 조선군은 전주성에서 방어태세의 시간을 벌게되지요.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다 7월17일 금산으로 퇴각합니다.

 

안덕원 전투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퇴각하는 길에 조선군의 분전에 감명을 받았던 모양인지, 웅치에서의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합니다.

 

안덕원 전투에서의 승리 및 이치에서 권율의 승리로 1차적인 전라도 진입로를 막아내며 전황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5. 영화 한산의 오류?

영화 한산에서는 웅치전투가 한산대첩과 같은날 발생한 전투로 표현되었지만, 실제 웅치전투는 한산해전 하루전인 1592년 7월7일(음력)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또한 왜군의 목표가 전라좌수영이 아닌 전주였으며, 고바야카와와 와키자가 사이에 사전 교류가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영화 한산

 

제일 중요한 전투 결과 역시 역사와는 다른데요, 조선군은 웅치에서는 일단 패배한 것이 맞습니다.

 

이후 전투인 안덕원에서는 승리하지만 일단 웅치에서는 상당수 피해를 입고 패퇴합니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웅치를 승리한 것으로 그린 적이 많은데요, 이는 안덕원 전투까지 합쳐서 생각한다면 맞기는 하지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웅치는 패배한 전투입니다.

 

또한 권율이 활약하여 이긴 전투인 이치전투와 같은날 일어난 일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오류입니다.

 

웅치전적비

 

선조수정실록에 해당년 7월에 있었던 일들을 긁어모아 1일자로 적어두었는데 웅치와 이치전투가 나란히 실렸고, 전산화가 되지 않은 1960년대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두 전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서술하면서 그런 인식이 굳어진 것이지요. 

 

한산해전과 같은 날 벌어진 전투는 웅치가 아닌 권율의 이치전투입니다(1592년 음력 7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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