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위는 조선 중기의 무인이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에 크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 장군이지요.
또한 활솜씨가 상당히 뛰어나 호크아이나 레골라스를 연상케 하는 인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번 post에서는 실제 조선군 안위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23전 23승 신화의 기록에 대한 post도 같이 재미있게 봐주세요.
안위 장군
1. 안위 태생
안위(安衛)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안원군파 13세손으로서 자는 대훈(大勳)입니다.
1563년 명종 18년 전라도 김제군 백석면 학당리(현재 전북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 순흥 안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안경신과 어머니 조양 임씨 사이에서 3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어머니 조양 임씨는 임핍의 딸입니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의 연좌제로 5촌 조카라는 이유때문에 평안도 용천군에 유배되고 맙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도성이 함락되자 풀려나게 되며 평양성에 들어가 종군하게 됩니다.
2. 군인으로서의 출발
1592년 영유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으로서 활약을 시작하게되며 친분이 있던 이항복의 추천으로 대동찰방 겸 조방장이 됩니다.
1594년 선조27년에 거제현령으로 제수되었고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하여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한 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웁니다.
1597년 부산 일본진에 침투하고 방화에 성공하여 일본군의 건물과 군수 물자를 태우는 공을 세우게 됩니다.
안위는 해전에 앞서 왜군 동향파악 업무를 맡았으며, 이 당시에 이순신과 많은 교류 및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당시 안위와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해전 이후 서로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안위장군은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수군이 아닌 육군 출신의 장군이었으며, 특이하게 육전에서도 활약을 한 인물이지요.
3. 명량에서의 활약
정유재란 명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함대에 합류아여 일본 수군 30척을 격침하고 대승을 거둘 때 크게 활약하게 됩니다.
명량해전 초반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제외하고 나머지 12척이 적을 두려워해 뒤로 빠져서 지켜보고 있게 됩니다.
이순신은 아군의 사기를 진작하기위해 홀로 적과 맞서게 되고, 어느정도 적의 예봉을 꺾자 영하기와 초요기를 올려 뒤로 빠져있던 함선을 부르게 됩니다.
이 때 안위 장군이 가장 먼저 이순신의 기함으로 도우러 오며, 이때 이순신이 안위를 꾸짖게 됩니다(정유일기 9월 16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라고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뒤로 빠져있던 12척 중에는 제일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왔으며 이 후 용감하게 싸우게 됩니다.
이 때 안위의 함선은 일본 함선 3척에 포위되어 백병전까지 일어나며 격침될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이순신의 대장선이 도우러 와 함께 싸워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이 후 뒤로 빠졌던 함선들도 하나둘씩 전장에 참여하게 되고 물살이 바뀌면서 승기를 잡은 조선군은 결국 일본군을 몰아내게 되지요.
4. 명량 이후
명량에서의 공으로 안위는 전라우수사(전임 이억기)로 승진하고 부임 2일 후인 1598년 2월 16일에 통제공 이순신과 함께 강진의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다시 돌아온 포로로부터 고시니 유키나가가 주둔한 예교성에 군이 모이고 성을 쌓아 농성할 계획임을 확인한 안위는 이를 3월에 조정에 상주합니다.
이후 여러 전투에 참가, 노량해전에서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전란이후 이러한 전공들이 이순신의 장계덕에 알려져서 1598년에 전라 우수사로 제수되며, 1599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600년에는 전라병사에 제수됩니다.
1601년 전라병마사로 근무하게 되며, 제주도에서 벌어진 소덕유의 모반사건을 사전에 막는 공을 세웠지만, 소덕유가 마침 정여립의 사촌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정여립은 안위의 친척) 탄핵을 받고 7월 30일 면직됩니다.
1603년 다시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군사를 보내고 베를 거두거나 배를 만들어 사사로이 파는 일이 있었고, 군비를 빼돌려 왜국에 파는 등의 비리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한 일로 전라 좌수사에서 파직됩니다.
1605년 10월 9일에 안위는 다시 복직하여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과거 전라 병마사로 재직중에 과거의 추문(부임하는 수령의 첩을 가로챈 소문)이 사헌부에 의해 끄집어 내어져 다시 파직되고 1606년 1월 25일에 경상좌수사가 됩니다.
1608년 다시 전라수사로서 수군을 통제하였고 이해 군산도의 해적선 6척이 부안 앞바다에서 상선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조정에 보고합니다.
1612년 다시 한 번 전라병마사 재직 중에 추문과 관련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포도가대장직에서 파직됩니다. 1619년 평안 방어사,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대장으로 임명될 뻔 하였으나 반대파의 반대로 인해 향리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게 됩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74세 고령으로 왕의 수레를 모시고 따라가기 위해 올라가던 중 은진에 머물고 있었으나 길이 막힌 상황이었고, 따라서 남한산성이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1644년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래의 안위 장군묘는 전북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산4-5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대 인물들은 특히 안위를 높게 평가했는데요,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안위를 "적개심이 투철하고 자기목슴을 돌보지 않는 장수"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항복 역시 "안위의 공이 으뜸"이라며, "적들이 전라우도에서 곧장 충청도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는 안위의 힘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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