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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 같이했던, 이순신이 아낀 부하 이운룡 장군, 충렬사를 세우다

cky0214 2023. 12. 1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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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룡은 무의공 이순신,권준과 함께 통제공 이순신이 가장 아꼈던 부하장수 중 한 명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처음에는 원균 휘하에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이순신 아래에서 전쟁을 치룬 인물이지요. 이운룡의 특이한 점은 이순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같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순신과 같이 성정이 곧고 바른말을 잘했다고 합니다.

 

이운룡

 

이번 post에서는 이운룡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송희립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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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룡


1. 백의종군을 함께하다

이운룡은 1562년 생으로 본관은 재령, 자는 경현 또는 경회, 호는 동계입니다. 경상도 청도군 상남면 명대동(현재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마을)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남해현령(종5품) 이몽상입니다.

 

이운룡

 

정로위로 근무하다가 22살인 1584년(선조 17년) 별시 무과에 병과 85위로 급제하여 1587년(선조20년)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북방 여진족과의 전투인 녹둔도 전투 이후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이후 1589년(선조 22년)에 복직되어 남해안 경상우수사 원균 아래 옥포만호로 부임하게 됩니다. 

 

 

녹둔도전투는 1587년(선조20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서 벌어진 2차례 전투이며, 두만강 하류 강 가운데 위치한 녹둔도에 여진부족 중의 하나인 시전부족이 몰래 습격해 온 것을 막기 위한 조선군과의 충돌이었습니다. 

 

녹둔도 전투

 

적은 수십명의 병력으로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해 조선인 11명이 전사하고 군민 160명이 납치되었던 전투였는데, 일단 패전에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 했던 것이죠. 

 


2. 임진왜란에서 활약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망가려던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사또께서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곳은 바로 호남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로워집니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원균

 

라고 하며 이순신 전라좌수사에게 구원요청을 하도록 설득하게 됩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며,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표현된 적이 많습니다. 이운룡의 제안에 원균은 즉시 율포만호였던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응한 이순신은 원군을 이끌고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첫 전투에 나서게 되지요.

 

 

5월 7일 원균이 인솔한 경상도 수군(그래봤자 판옥선 3척)과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이 합세해 거제도 동쪽 옥포양에서 적선을 맞아 싸웁니다. 옥포해전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운룡은 이 옥포해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적선 50여척을 격침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등에 참가하여 용맹을 떨치게 됩니다. 

 

옥포해전

 

이같은 공으로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로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1597년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고 마는데요. 이 때 이순신의 파직 때 같이 좌천되어 육지에 있었기에 목슴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영천과 창암 등지의 육전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행히 목슴을 부지한 이운룡은 이후 명량과 노량에서 전쟁 끝날때까지 활약을 이어가게 됩니다.

 


3.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고 1605년 내직으로 비변사 당상관을 지내고 외직으로 제 7대 삼도 수군통제사 자리에 제수됩니다. 이후 선무 공신 3등으로 식성군에 봉해졌고, 1610년에 죽고 난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참고로 이순신 휘하에서 선무공신에 봉해진 사람은 권준, 무의공 이순신(동명이인), 이운룡 셋 뿐입니다. 

 

현재 명조팔사품이 보관 중인 통영시의 충렬사는 이운룡이 1605년 통제사에 임명되고 난 후,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하네요. 이운룡 이후 후임 삼도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충렬사에서 충무공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통영 충렬사

 

이운룡은 통제공 이순신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고 하는데요, 남들과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곧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핵을 여러번 많이 당하지요. 실제 1602년 모친상으로 진을 비워 탄핵받은 적도 있고 비변사 유사당상에 올랐으나 탄핵으로 은퇴하기까지 합니다. 이후 복권되어 1607년 여진족 침입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를 진압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1610년 또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많은 점에서 이순신과 뜻이 통하는 장수였으며, 원균 휘하였던 이영남과 함께 자주 이순신을 찾아와 함께 식사하고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운룡이 경상좌수사로 승진한 후에는 아예 한산도에 함께 거주하며 매일 이순신을 만나러 오기까지 하지요. 나중에 이운룡이 다른곳으로 떠나게 되어 인사차 방문했는데 이순신은 아쉬운 마음에 술을 듬뿍먹여 술에 취해 그날 떠나지 못하고 다음날 떠나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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