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선비족의 유래와 역사 및 기원, 선비족이 세운 나라 인물들

cky0214 2024. 1. 19. 01:20
반응형

5호 16국 시대 이후로 선비족은 중국에서 수 많은 나라를 세웠으며 역사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오랑캐로 취급받았던 적도 있었으나 4세기 초반 연나라의 건국 이후로 주류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선비족

 

물론 오랜시간이 흐른 후 한족과 동화되어 민족성을 잃어 버리긴 했으나 선비족만큼 중원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민족은 몇 없지요.

 

이번 post에서는 선비족의 역사와 이들이 세운 나라들에 대해 알아봅니다.

 

친척뻘인 거란족의 역사에 대한 post도 같이 재밌게 봐주세요.

 

 

역사속으로 사라진 북방민족, 한 때 북방의 패자 거란족 역사

10세기 초 북방의 대 제국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그들의 위세는 서쪽으로는 몽골초원, 동쪽으로는 연해주 끝, 남쪽으로는 송나라 북부 연운 16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

cky0214.tistory.com

 

 

선비족


1. 선비족 유래

선비(鮮卑)족은 내몽골, 만주, 몽골, 대흥안령산맥, 일부 러시아 극동남부 지역에 분포했었던 동호계 민족이며 주로 유목과 수렵을 하며 살던 민족입니다.

 

이들의 언어는 준몽골어족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으며 단어와 어휘가 현재 몽골어의 사투리에 가까울 정도로 가깝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선비족은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에 복속되어 있다가 흉노가 멸망한 뒤 자립하여 각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흉노와 선비

 

선비족은 하나의 큰 부족이라기 보다는 부족 연합 형태였고 단석괴 이전에는 명확한 맹주가 없었으며, 선비족 내부에서도 여러 각 부족(부)가 존재했습니다(모용,탁발,독발,단,걸복 선비).

 

각 선비족 부족에는 추장개념의 "대인"(대칸)이 존재했고 서로 싸우거나 연합의 형태를 취합니다.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중국 후한 말 시기로, 단석괴가 등장해 북방 유목민족을 통일하여 후한을 위협했지만 그의 사후 선비족은 여러 부로 분열하고 쇠퇴했지요.

 

오히려 삼국시대부터는 동호의 한 분파였던 오환족 세력이 선비보다 강하기도 했습니다. 

 

선비족

 

조조에게 항복한 후 오환은 약해지고 사마염의 진나라에 의해 통일 될 때까지 선비족은 조용히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서진의 막장극 팔왕의 난 이후로 다른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세워 독립하게 되지요. 

 

전연부터 후연, 북위, 서위, 수, 당에 이르기까지 화북을 또는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지배계층으로 성장했으며, 이후에도 선비계 후손들인 거란족에 의해 중국 북방은 여전히 선비족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2. 모용선비 나라와 인물

모용선비는 선비족 중 중국역사에서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낸 민족입니다. 모용부라고도 부르지요.

 

요하강 유역에 거주하던 모용선비는 나라를 이루기 전 중국 서진때 서진을 공격하다 크게 패하기도 하고, 고구려 미천왕과도 319년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세웠던 나라 및 인물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1 전연(前燕, 337~370년)

실제 국호는 연()이며 후대의 다른 연과 구분하기 위해 앞에 전()을 붙혀 부릅니다. 

 

요서를 근거지로 모용외에 의해 건국되었고, 모용황 시기에 황제를 칭하게 됩니다.

 

전연(빨간색)

 

갈족이 세운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중원에 진출하여 관동(서주,청주,기주 등)을 차지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초대황제 모용황은 고구려를 침입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기도 한 인물입니다. 

 

마지막 황제 모용위 재위 10년인 370년에 부견의 전진에게 패해 전연은 멸망하고 부견에게 항복합니다. 

 

 

2.2 후연(後燕, 384~407년)

전연이 370년 부견의 전진에게 멸망하고 황족들은 전진에 항복하게 되는데, 383년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쇠퇴하자 전진에 항복했던 모용황(전연초대황제)의 5남 모용수가 독립하여 후연을 건국합니다.

 

후연

 

모용수는 난세의 영웅으로 군을 지휘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전연의 권력다툼에 밀려 부견의 전진에게 망명합니다.

 

동진의 영웅 환온의 침입당시 그를 양양에서 격퇴하며 천하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384년 전진 내부에서 반란이 속출하자 모용수는 업성으로 자진하여 가게되고 이 후 낙양을 거쳐 중산에 웅거하여 연왕을 칭하며 후연을 건국합니다. 

 

파죽지세로 전연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으나 같은 선비계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와의 참합피의 전투(395년)에서 크게 패해 국운이 저물게 되고 결국 화북지역을 모두 북위에게 빼앗기게 되지요.

 

북위에게 패배 후 후연(북연)

 

결국 후연은 요서,요동 일부만을 가진 작은 지역의 나라가 되며, 이후 북위, 고구려의 압박속에 4대황제 모용희 때 멸망합니다. 

 

2.3 남연(南燕,398~410년) 과 서연(西燕,384~394년)

서연을 건국한 모용홍은 전연의 2대황제 모용준의 7남이었으며 전진의 부견에 의해 전연이 멸망하자 부견에 의해 관중(장안일대)로 강제 이주 당한 인물입니다.

 

비수의 대전 이후 전진의 세력이 약하되자 384년 관중지역에서 거병하여 장안을 점령하고 연(서연)을 건국합니다. 하지만 장안을 차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안을 버리고 수십만의 선비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납니다. 

 

서연

 

1개월동안 4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다 모용영이 전진과의 싸움에서 승리 후 병주 남부를 점거하고 모용영이 황제를 칭하면서 서연왕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394년 후연을 건국한 모용수의 공격으로 10년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남연은 398년 모용덕이 세운 나라로 모용덕은 전연의 초대황제 모용황과 공손씨의 아들로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모용덕은 모용수가 반란을 일으켜 후연을 건국하자 이에 동조하여 여러 공을 세우게 되지만, 탁발규의 북위군에게 수도 중산이 함락되자 남하하여 하남성에서 연왕을 자칭하며 독립합니다. 

 

남연

 

모용덕의 남연은 북위의 공격으로 계속 남진하긴 했지만 남쪽의 동진이 혼란스러워지자 동진정벌에 나서기도 합니다. 

 

405년 초대황제 모용덕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모용초가 제위에 오르게되나 측근정치로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410년 동진 유유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2.4 토욕혼(285~663년)

토욕혼을 건국한 모용토욕혼은 모용선비의 3세기 후반 지도자였던 모용섭귀의 장남입니다. 

 

이복동생이자 전연을 건국한 모용외와 사이가 나빴고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자, 무리를 이끌고 서역으로 이주하여 부사를 수도로 삼아 토욕혼을 건국합니다.

 

여러 이름이 있지만 시조인 모용토욕혼의 이름을 딴 "토욕혼"이 널리 통용됩니다. 

 

토욕혼

 

371년 전진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북위와 손을 잡고 북하를 공격하여 431년 멸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토번과 헷갈릴수도 있지만, 막상 토욕혼은 7세기 중엽 토번 손첸감포에게 멸망당합니다. 


3. 단선비 나라와 인물

단선비는 단부(段部)라고 불리우며 난하 유역에 거주한 선비족의 한 일족입니다. 주목할만한 나라를 건국하지는 못하는 일족입니다.

 

 

중국 서진 시절 우문부(우문선비)와 함께 강성하였고, 모용부와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초반은 단선비가 강성하여 모용선비로부터 공물을 받고 혼인을 하기도 했습니다. 

 

단선비부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진나라의 유주 제군사 왕준과 동맹을 맺고 그를 지원하다가 312년부터는 후조의 석륵과 화친을 맺어 왕준을 쇠락하게 만듭니다.

 

단선비가 세운 국가로 단명정권인 제나라가 있습니다. 단제라고도 하지요.

 

단부의 선우였던 단계(段階)는 딸을 모용외(전연황제)에게 시집보내 훗날 모용황이 태어납니다. 


4. 탁발선비 나라와 인물

탁발선비는 훗날 화북을 통일하고 수,당에 이어지는 고대 중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선비 부족입니다. 

 

주로 음산산맥 동부 일대에 거주하였으며,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가 중국을 공격하다 죽은 이후 우문,단부,탁발 선비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탁발선비 역시 중국 한족을 공격하면서 정복전쟁을 했던 민족이지요. 서진시대 이후 점점 강성해져 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4.1 대 ( ,315~376년)

탁발선비는 3세기 중반부터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이것이 훗날 국호를 위나라로 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서진시대까지 조공을 바치게 되는데, 서진 조정에서는 이들을 이용하여 북방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산서 지방 북부에 땅을 주어 살게합니다.

 

탁발선비 대나라

 

315년 탁발부의 대인이었던 탁발의로가 서진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대왕(代王)으로 봉해지며 탁발부의 대나라가 시작됩니다.

 

376년 탁발십익건 통치 시절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했으나, 383년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쇠락하자 탁발십익선의 손자인 탁발규가 386년 대나라왕이라 칭하고 자립합니다. 1년 뒤 국호를 위나라로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화북을 통일한 북위입니다. 

 

4.2 북위(北魏,386~534년)

386년 탁발부의 지도자 도무제 탁발규가 대나라를 부활시키고 1년만에 국호를 위()로 바꾸고 칭제건원합니다.

 

후연의 모용수가 395년 처들어오지만 참합피 전투에서 승리하며 화북의 주도권을 잡게 되며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함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침략의 시작을 알립니다.

 

북위 초반

 

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때 북하, 북연을 멸망시키고 439년 결국 북량까지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게 됩니다. 

 

북위 화북 통일

 

5세기 말 제 7대 고조 효문제 시기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빠르게 유목민의 습성을 잃어버리게되며, 북위 후반기 523년 멸망의 원인이 된 육진의 반란의 원인이었습니다. 

 

효문제의 낙양천도 이후 북방 유연을 방어하기 위한 6진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죠. 6진의 난은 선비족 출신 장수 이주영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후 조정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게 됩니다. 

 


5. 우문선비 나라와 인물

우문선비는 시라무렌 강 유역에 거주하던 선비족의 한 일파입니다. 

 

수렵생활을 주로 했으며, 이들의 풍속에 천자를 우문이라고 해서 우문을 성씨로 했다고 합니다. 

 

시라무렌 강에서 요서로 이주했다가 서진 시절 단부(단선비)와 함께 강성해져 모용부에게 공물을 받았습니다. 

 

우문선비

 

319년, 고구려 및 단선비와 연합하여 보용선비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지만 모용선비의 이간계로 고구려와 단부는 철수하고 우문부 혼자 싸우다 모용선비에게 크게 패합니다. 

 

이 때 우문선비는 멸망했으며, 대인인 우문일두귀는 막북으로 달아났다가 고구려로 도주했고 모용선비가 우문선비 근거지에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그 무리는 흩어집니다. 

 

이 후 시라무렌 강 지역은 거란족이 차지합니다. 

 

5.1 북주(北周,557~581년)

역사속에서 우문씨가 다시 보인 것은 북위로 부터 분열한 서위에서 부터입니다. 우문태는 우문선비의 후손으로 북위의 실력자였는데, 서위의 승상을 지냈습니다.

 

556년 우문태가 죽고 그의 조카 우문호가 서위의 황제 공제를 협박하여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각에게 선양하도록 합니다.

 

이 때 주나라가 건국되며 과거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주(北周)라 부릅니다. 

 

북주

 

무제때 나라가 안정되고 국력이 신장되었고 이에 따라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고 고구려와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578년 우문윤이 즉위하면서 나라가 혼란해지는데, 이 때 선제 우문윤의 황후 양황후의 부친이었던 양견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합니다. 

 

581년 양견은 그에게 대항하는 난을 진압하고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면서 북주는 24년만에 멸망합니다.

 


6. 독발선비 나라와 인물

독발부(禿髮部) 독발선비는 하서회랑(서량, 현재의 간쑤성) 인근에 거주한 선비족 일파입니다.

 

부 시조인 독발필고(?~231년)가 성씨로 사용한 "독발"은 원래 "탁발"과 같은 음이었지만, 한자상 표기가 갈리면서 부족도 나뉘어졌다고 합니다.

 

독발선비

 

독발필고의 독발수전이 이불에서 태어난 것을 계기로 독발을 성씨로 삼았습니다. 

 

탁발부와 나뉘고 나서 각자 세력을 이루었지만 나라를 건국하기 이전에는 서진의 계략 및 공격으로 탁발, 독발부 모두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383년 비수대전 이후 전진이 몰락하자 전진 장수 여광이 양주를 장악하고 후량을 건국하자 이에 대항해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남량을 건국하지요. 

 

원래 독발부는 탁발부와 동족인 관계로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에서 황족의 대우를 받습니다. 

 

6.1 남량(南涼,397~414년)

독발부의 수장 독발오고는 전진에서 독립한 여광의 후량에 의탁하였지만 독립하여 현재의 칭하이성 일대를 거점으로 독립하여 남량을 건국합니다.

 

남량

 

2대왕 독발리록고는 여광의 후량과 대랍하던 요장의 후진에게 의탁하였고 작위를 받게 됩니다. 후량, 북량과는 계속 대립하지요.

 

3대왕 독발녹단 시절 북량,북하,후진과의 잦은 전쟁 및 내부적 반란에 힘겨워했고 결국 걸복선비의 나라 서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7. 걸복선비 나라와 인물

걸복선비는 농서 인근에 거주했던 선비족 일파입니다.

 

5호 16국 시절 부견의 전진을 공격했다가 대패하여 항복하고 전진에 복속합니다. 

 

383년 비수의 대전 직전 걸복부의 걸복국인은 농서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합니다. 

 

7.1 서진(西秦,385~431년)

걸복국인이 비수대전 이후 385년 세운 나라입니다.

 

실제 나라가 존속한 시기는 385년~400년, 409년~431년인데 중간의 9년은 후진에 복속하여 잠시 나라가 사라졌었습니다.

 

1대왕 걸복국인은 대선우를 칭했고 전진으로부터 원천왕에 책봉됩니다. 

 

서진

 

제2대왕 걸복건귀가 394년 진왕을 칭했습니다. 400년부터 9년동안 요장의 후진에 복속하여 잠시 망명생활을 하다 409년 나라를 되찾아 다시 진왕을 칭합니다.

 

431년 걸복모말 제위시절 북하에게 망하게 됩니다. 

 


8. 수, 당도 선비족 후손이다?

북위, 서위,동위, 북주,북제, 수와 당 왕조 모두 황실과 지배층은 선비족 및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 집단이 지배층입니다.

 

선비족 문벌 귀족인 관롱집단인 것이죠. 

 

특히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은 8주국 선비족 가문이며 그의 아버지인 양충은 한족 성씨인 양씨를 하사받아 양충으로 개명합니다.

 

선비족 대귀족인 독고신은 그의 딸 독고가리를 양견에 시집보내기도 했지요.

 

당나라를 건국한 당고조 이연도 선비족 문벌귀족인 관롱집단 중 하나였고, 모계쪽은 확실히 선비족이 맞으며 부계는 확실 치 않으나 탁발씨의 후손으로 알려졌습니다. 

 


같이보면 좋은 글

 

역사속으로 사라진 북방민족, 한 때 북방의 패자 거란족 역사

10세기 초 북방의 대 제국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그들의 위세는 서쪽으로는 몽골초원, 동쪽으로는 연해주 끝, 남쪽으로는 송나라 북부 연운 16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

cky0214.tistory.com

 

대거란 전쟁 흥화진의 영웅, 처절한 고려 양규 장군 이야기

고려와 요나라(거란)의 30년에 걸친 전쟁에서 여러 영웅이 있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양규 장군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희의 담판으로 마무리되었던 고려,거란(이하 여요전쟁) 1차 전쟁

cky0214.tistory.com

 

노익장을 과시했던 명나라 야전사령관 등자룡 장군, 등소평이 후손

명나라 등자룡 장군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애국 장수로 추앙받는 대표적인 영웅입니다. 정유재란 시 진린과 함께 조선에 출병하여 노량해전에서 큰 활약하였고 이

cky0214.tistory.com

 

한국 광동 진씨의 시조,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 장군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명나라 만력제는 진린으로 하여금 수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돕도록 합니다. 연합함대 구성 초반 통제사 이순신과 작은 갈등을 빚지만 이내 통제사의 인품과 능력에 반해 진

cky0214.tistory.com

 

청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이유? 병자호란의 의문점

다들 아시는바와 같이 병자호란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하여 인조가 머리를 조아린 사건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1636년에 일어

cky0214.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