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반란을 잠재우고 개경 나성을 축조하다. 고려 이자림(왕가도)의 삶

cky0214 2024. 1. 24.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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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림(왕가도)는 고려 현종때의 문신이자 외척입니다.

 

현종때 김훈과 최질의 난을 정리하고, 개경 나성축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왕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지요.

 

이자림은 일개 말단 하급관리로 시작해 재상까지 영전한 입지전적의 사람입니다.

 

이자림

 

이번 post에서는 이자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김훈 최질의 난 post도 같이 봐주시구요.

 

 

또 하나의 무신정변 김훈과 최질의 반란, 고려를 전쟁으로 빠트리다

김훈과 최질은 1010년 고려의 2차 전쟁 당시 강조의 30만 대군이 거란에 패하고 난 후, 거란의 진격을 막고 피해를 입힌 공으로 상장군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자리에 무장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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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림(왕가도)


1. 하급관리로 시작하다

이자림(李子琳,?~1034년)은 청주이씨의 호족출신으로 후에 이가도(李可道)로 개명하고, 후에 공을 세워 국성(왕씨)을 하사받아 왕가도(王可道)가 됩니다.

 

성종때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덕종때까지 4대 왕을 모셨으며 현종 때 큰 활약을 해 현종의 배향공신이 되는 인물입니다.

 

 

성종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서경의 장서기가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한 신흥 문관입니다.

 

왕가도

 

서경 장서기는 문서 관리를 담당한 하급 직위이지요.

 

장서기 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후의 활약을 보면 어느정도 능력있고 인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조의 정변후에도 여전히 서경을 위시한 북방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현종 시절 초반 화주 방어사(방비 관직), 권서경유수판관을 역임하며 북방의 방어에 힘썼고, 조정에 돌아와 중추원부사, 참지정사(내사문하성 서열 3위의 자리)를 지냅니다. 

 


2. 반란을 잠재우다

이자림은 현종 시절,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1014년 11월 김훈과 최질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김훈과 최질

 

이때 이자림은 화주(함경도 영흥군) 방어사에서 임기를 마무리하고 개경으로 돌아온 상태였는데 이 반란을 두고 매우 분개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현종을 만난 이자림은 현종에게,

 

"한고제가 운몽에서 놀이한 고사(한신에게 연회를 베풀어 체포)를 아시옵니까?"

 

 

라고 은근히 반란을 잠재하라는 뜻을 전합니다. 

 

이자림이 부임지마다 명망있고 능력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현종은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에 임명하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서경에 보냅니다.

 

김훈 최질의 난

 

이자림의 배후에서 현종은 은밀히 반란을 잠재울 계획을 세웠고, 이자림은 이를 보필하여 준비를 끝냅니다. 

 

현종은 김훈, 최질 등의 반란 세력을 데리고 서경의 장락궁으로 가서 연회를 열게 됩니다. 

 

이 때 이자림은 무신들이 연회에서 술에 취하자 몰래 준비했던 군사들을 들여 김훈,최질을 비롯한 19명을 모두 잡아 죽이고, 그들의 가족을 체포 및 귀양보냅니다.

 

이 일로 이자림은 현종의 눈에 들게되고, 이후 고속승진을 하게 됩니다.

 


3. 개경 나성 축조

이자림이 이가도로 개명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021년 최사위가 세운 현화사비의 1022년 채충순이 쓴 뒷면에는 이가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개성 현화사비

 

고려사 1020년 기사부터 이름이 나오므로 1015년과 1020년 사이에 개명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서 중추원의 차관으로 등장하며 경상도 지방에 나타난 사리를 회수하러 다녀옵니다.

 

1027년 참지정사가 되고 강감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던 개경 외성 건설의 책임자로 부임합니다. 

 

1029년 이가도는 황보유의, 황주량, 서눌등과 함께 개경 나성 축조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무리 짓게 됩니다. 

 

개경나성

 

이 공으로 공신호를 받고 개성현 개국백(開城縣開國伯)이 되며 부인 김씨 또한 개성현부인에 봉해집니다.

 

이 때 왕씨 성을 하사받아 이가도가 아닌 왕가도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또한 장녀 원질귀비가 현종의 후궁이 되면서 왕가도는 외척이자 왕의 장인, 당대에 누구못지 않은 중신이 됩니다.

 


4. 거란 공격을 건의하다

현종 이후 덕종시절, 차녀 경목현비가 덕종과 혼인하면서 왕의 장인이 되고 1030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에 임명됩니다.

 

이 관직은 내사문하성의 2인자 자리이지요. 

 

왕가도는 거란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덕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란의 성종이 죽고 흥종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신으로 갈 때 압록성교를 헐고 억류된 우리 사신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듣지 않을 경우 절교하자고 덕종에게 청하게 됩니다. 

 

거란 성종

 

이를 거란이 응하지 않자 해마다 보내던 하절사의 파견을 중지하고 연호 갱신을 거부하게 되지요.

 

덕종의 또다른 배향공신 유소가 의주 침공을 건의하자 왕가도는 적극 찬성하였고, 덕종에게 출정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무리라는 많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덕종은 전쟁만큼은 결국 치루기가 어렵다고 판단, 거부하여 출정은 취소되고 말지요.

 

 

나이도 많고, 더이상 조정에서 자신의 입김이 통하지 않자 왕가도는 한계를 느끼고 사퇴하여 고향 청주로 돌아갑니다.

 

1034년 5월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덕종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뤄주었으며 명예직은 태사와 중서령을 추증합니다.

 

또한 현종의 묘정에 같이 배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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