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중국역사 3대 치욕(굴욕) 중 하나 영가의 난, 이민족에게 중원을 뺏기다

cky0214 2024. 3. 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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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3대치욕은 영가의 난(永嘉之亂), 정강의 변, 토목의 변입니다.

 

그 중 시기적으로 제일 앞선 영가의 난은 4세기 초반에 일어난 사건이며,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사건이지요.

 

이 후 5호 16국 시대로 이어지며, 송나라가 건국되는 10세기 초반까지 무려 600년간 중원은 이민족의 차지가 됩니다.

 

영가의 난

 

한족에게는 중원을 빼앗긴 사건이지만 어찌보면 중원의 개념이 확장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번 post에서는 영가의 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영가의 난의 원인이 된 서진 팔왕의 난에 대한 post도 먼저 봐주세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막장 내전, 사마씨 서진의 팔왕의 난

사마씨(초대 사마염, 사마의 손자)의 진(晉)나라는 중국 위촉오 삼국 분열시기를 마무리하고 전국을 통일합니다. 그러나 통일이후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삐걱거리더니 결국에는 각 지방 왕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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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


1. 사건의 발단

영가의 난에서 "영가"는, 이 난이 서진 마지막 황제 회제 사마치의 연호가 영가(永嘉, 307년~312년) 연간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흉노족 유연이란 인물에 의해 전조가 건국되고 서진의 멸망까지를 영가의 난이라 지칭합니다.

 

진혜제 사마충 시절 팔왕의 난(300년)으로 진나라 막장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화북지역의 혼란은 극에 달하고 수 많은 유민이 유랑하며 황폐화 됩니다.

 

 

팔왕의 각 진영에서는 권력을 향한 일보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기에 병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흉노족과 선비족의 군대까지도 불러들이며 외세의 개입을 유발합니다.  그 중 산서성 중심으로 살고 있던 남흉노의 족장 유연은 성도왕 사마영이 업에 있을 때 삭녕장군으로 임명되어 팔왕의 싸움에 합류합니다. 

 

한나라 유연

 

그러나 흉노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는 진나라의 내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부르짖는 함성이 점점 높아집니다. 

 

이 때 흉노의 원로격인 우현왕 유선은 업에 밀사를 파견하여 유연의 귀환을 독촉합니다. 유연을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해서였지요.

 

유연은 성도왕에게,

 

"흉노의 군대를 이끌고 오겠습니다."

 

라고 하며 귀국하게 됩니다.

 

유연이 귀국하자 흉노의 여러 부족은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고 순식간에 5만의 군사를 모으게 됩니다.

 

영흥 원년(304년) 10월 유연은 한왕을 자칭하고 연호를 원희로 정하며, 수도를 평양(산서성 임분시 서북쪽)으로 옮기지요. 

 

대선우 유연

 

중국 5호

 

우현왕 유선을 승상으로 삼는 등 한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저치 체제를 형성합니다. 

 

또한 동족뿐 아니고 흉노의 다른 부족인 갈족까지도 그의 산하에 넣었으며, 갈족의 유능한 지도자 석륵또한 부하로 편입시킵니다.

 

이후 308년 영가 2년에 황제를 칭하며 본격적인 세력확장을 시도합니다.

 


2. 내분과 포위된 낙양

한라나 황제가 된 유연은 310년 7월에 죽고, 그의 태자 유화가 그 뒤를 잇게 되었으나 내분이 일어나 태자의 동생 유총이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릅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총은 대단히 유능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유연이 그를 다사마, 대선우라는 요직에 임명하여 병권을 쥐어준 것을 보면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지요.

 

영가 5년(311년) 한의 유총은 낙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들의 작전은 우선 하남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여 낙양을 고립시키는 것이었죠.

 

흉노족 한나라

 

서진의 회제를 보필하고 있던 태부 동해왕은 전국에 격문을 보내어 낙양의 위급을 알리고 구원병을 모집합니다. 

 

그러나 이미 내분으로 중앙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어떤 구원병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국 동해왕은 사방에서 긁어 모은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 동쪽 허창에 주둔합니다. 

 

그런데 멍청한 회제는 동해왕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분하고 괘씸하여 동해왕을 죽이라는 밀조를 보내지만 밀지를 전하던 구희가 붙잡혀 발각되고 맙니다.

 

사마치

 

동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다못해 병이 들어 죽고 후사를 태위 왕연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이 왕연은 서진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단지 고립된 낙양에서 어떻게 빠져나갈까만 생각하던 자였죠.

 

동해왕의 죽음은 왕연에게 있어 아수라장의 위험지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동해왕의 영구를 호송하여 동해(산동성)에 귀장한다는 구실로 황족, 귀족, 명문의 자제 10만명을 거느리고 황제를 낙양에 남겨둔채 낙양을 떠납니다.

 

왕연은 애당초 10만명을 데리고 갈 생각은 없었으나 낙양사람들이 내란과 굶주림에 지쳐 낙양을 버렸다고 합니다.

 

10만에 달하는 인파는 눈에 띄기가 쉽지요.

 

석륵

 

갈족의 장군 석륵은 고현의 영평성에서 이들의 이동 소식을 듣자 즉시 공격을 개시하여 모조리 격파합니다. 왕연과 서진 왕조의 친왕을 포함한 48명의 고위직들은 모조리 포로로 잡혀 살해당하지요.


3. 함락된 낙양

석륵이 왕연일행을 습격한 것은 311년 4월의 일이고 흉노군이 낙양성에 육박한 것은 5월의 일입니다.

 

유총은 석륵과 유요, 한족 왕미의 군대를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합니다. 

 

유총은 과거 팔왕의 난 시절 낙양을 한번 공략했다가 실패한 바 있어 이미 310년 10월부터 낙양 주변의 교통망을 철저하게 차단시켜 낙양을 완벽하게 고립시킵니다.

 

 

회제 사마치는 이 시점에서야 탈출을 결심했으나 육로는 차단당하고 수로는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당해 남은 배도 유총에 의해 모두 불타버려 빠져나갈 수 없었지요.

 

결국 311년 5월 낙양성에 유총의 군대가 들이닥쳤고 12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한 끝에 한 달만인 6월에 낙양성이 함락됩니다. 

 

영가의 난

 

황태자이며 회제의 조카인 사마전을 포함한 3만명이 살육되었고, 후한말 동탁에 의해 파괴되었던 낙양은 100여년만에 다시 완전한 폐허가 됩니다. 

 

회제는 체포되어 한나라의 수도 평양으로 연행되었고 313년 결국 회제는 독살당합니다. 

 

회제의 형뻘 되는 오왕 사마안의 아들 사마업이 장안에서 황제로 추대되어 민제로 불렸으나 이는 서진왕조의 마지막 발버둥에 불과했습니다. 

 

낙양이 함락됨으로써 사실상 서진 왕조는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장안에서 황제에 오른 민제 역시 316년 조나라(전조)로 나라명을 바꾼 한나라 유요에 의해 점령당하고 서진은 결국 멸망합니다.

 

이후 강남의 사마예가 강남에 동진을 수립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며, 화북지방은 전조를 비롯하여 석륵의 후조등 여러 이민족들의 나라가 들어서는 5호 16국시대에 돌입합니다.

 


4. 고구려와의 연관성

영가의 난을 일으킨 한나라와 고구려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지방이 와해되자 영가의 난 시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의 영토확장이 이루어지지요.

 

313년 미천왕이 서안평, 낙랑군 점령, 314년 대방군을 점령했습니다. 

 

또한 이후 5호 16국의 혼란을 틈타 광개토 대왕시절 모용선비의 후연을 정벌하고 요동으로 진출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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