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중국 송나라 황제가 잡혀버린 희대의 치욕, 정강의 변

cky0214 2024. 4. 13.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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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의 변은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역사 3대 치욕으로 불립니다.

 

1126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카이펑, 변경)을 점령하고, 황제 및 황족들을 모두 포로로 잡은 사건이지요.

 

정강의 변

 

당시 송나라의 연호가 정강(靖康)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으로 불리웁니다.

 

이번 post에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 알아봅니다.

 

영가의 난에 대한 post도 재밌게 봐주세요.

 

 

중국역사 3대 치욕(굴욕) 중 하나 영가의 난, 이민족에게 중원을 뺏기다

중국 역사에서 3대치욕은 영가의 난(永嘉之亂), 정강의 변, 토목의 변입니다. 그 중 시기적으로 제일 앞선 영가의 난은 4세기 초반에 일어난 사건이며,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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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의 변


1. 해상의 맹약

1115년, 거란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 완안아골타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합니다.

 

금나라

 

금태조 완안아골타

 

한편 고려와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전쟁없이 100년간의 평화를 누리던 요나라는 점점 안밖으로 병들어 갑니다. 

 

금나라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요나라를 공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지요. 

 

요나라에게 각종 굴욕을 당하고 있던 송나라 황제 휘종은, 전연의 맹약을 통해 요에게 바치고 있던 공물을 금에게 대신 바치겠다며 금에게 요나라 협공을 제의합니다.

 

금나라 입장에서도 요나라 후방에서 송나라가 지원한다면 당연히 도움이 되기에 이를 수락하여 동맹을 맺습니다. 

 

이 동맹은 1120년에 이루어졌으며, "해상의 맹약"이라 불립니다. 

 

해상의 맹약

 

바다를 통해 맺어졌다고 하여 해상의 맹이라 불렸습니다. 

 

이 맹약의 내용은,

 

1. 금나라는 중경을 공략하고 송나라는 연경(북경)을 공격한다.

 

2. 요 멸망 후 금나라는 만리장성 이남 지역인 연운 16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송나라에 넘길 것, 만리장성이 국경.

 

3. 송나라는 요나라에 보냈던 세공을 고스란히 금나라에 보낼 것.

 

4. 독단적으로 요나라의 항복을 받지 말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지요. 

 

바로 송나라의 군사력이 너무도 약하여,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진 요나라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지요. 

 

문치주의 통치방식에 더해 100여년간의 평화속에서 병사 수만 많았을 뿐, 전혀 훈련되어 있지 않은 병사 뿐이었습니다.

 

군대 통치 방식도 지나치게 중앙 정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휘에 능통한 장수도 적었지요.

 

실제로 해상의 맹약 이후 요나라의 패잔병 수천명에게 10만에 이르는 송나라 대군이 완벽하게 패배하고 쫓기는 등 졸전이 계속됩니다. 

 

금나라 송나라

 

이런 졸전에 금나라 조정도 믿기지 않아 일부러 송나라 군이 패배한 척 양쪽 사이에 간을 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추궁했다고 합니다.

 

사실 송군이 약한 것도 있지만 송 내부에서 방랍의 난이 발생하여 이를 진압하느라 분산된 면도 있었습니다.

 

이에 송나라는 연운16주에서 후퇴한 연주 6주의 토지만 받기로 하고 연주내의 모든 재물, 추가 공물, 운주10주를 고스란히 넘긴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넘어가지요.

 

금나라 철기병

 

이런 추태속에 1125년 요나라는 금나라, 송나라의 협공에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에 포로로 잡히면서 멸망하고 맙니다.

 

남은 세력은 서쪽으로 도망가여 서요(카라키타이)를 건국하여 명맥을 이어갑니다.

 


2. 송나라의 실책

금나라의 주된 공격으로 1125년 요나라의 수도 연경이 함락되며 요나라는 멸망합니다. 

 

그런데 송나라가 이때부터 똥볼을 차기 시작하지요. 

 

송 휘종과 송 조정은 금나라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았으며 포로로 잡힌 요의 천조제와 접촉하여 금나라에서의 내분을 조장하려는 시도도 합니다.

 

북송 휘종

 

이를 들키기까지 하지요. 

 

이에 분노한 금나라는 요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지 1년밖에 안된 1126년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합니다.

 

송나라가 상대가 될리 없지요.

 

순식간에 수도인 변경(개봉)을 포위하게 되며, 이 난리의 원인 휘종은 재빨리 장남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남쪽으로 피신가버립니다. 

 

흠종은 갑작스럽게 황제가 되었지만 침착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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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이 개봉에서 금군을 막고 구원군들이 몰려온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또한 동시에 금나라에게 태원, 하간부, 중산부등의 하북 및 하동의 영토 할양과 배상금 지급을 제시하며 평화 조약을 간신히 체결합니다.

 

흠종은 이와 같은 조약을 이행하려 했지만, 조정내 주전파 신하들의 의견에 동조하며 금과 한 약속을 또다시 파기하는 실책을 저지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금나라는 당연히 열이 받아 포위만 하던 개봉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1126년 11월, 8개월간의 공격끝에 함락시켜버립니다. 

 

금나라

 

금나라군은 송나라의 재상 장방창을 협박하여 괴뢰정권 초나라의 황제로 즉위시킵니다.

 

그리고 휘종, 흠종을 비롯한 송나라 황족 및 관료 3천명을 포로로 삼고 수많은 보물등과 함께 북방으로 끌고가기에 이릅니다.

 

이 치욕의 점령사건을 송나라 연호인 정강을 따서 정강의 변이라 부릅니다.

 

정강의 변

 

정강의 변

 

이로써 송나라(북송)은 일단 멸망했고, 수도 개봉을 비롯한 화북지역은 금나라의 점령하에 들어갑니다. 


3. 휘종과 흠종의 여생

금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덕을 망친 공작), 흠종에게 중혼후(덕을 망친 후작)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합니다.

 

또한 휘종, 흠종을 포함한 북송의 포로들은 금나라 북동쪽 오지 오국성(하얼빈)에 단체로 귀양살이로 보냅니다. 

 

금나라 오국성

 

정강의 변

 

남송을 세운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긴 했지만, 휘종 흠종 모두 금나라 땅에서 사망합니다. 

 

포로시절,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견양례등 굴욕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폐서인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지는 치욕을 겪지요. 

 

 

휘종의 딸, 며느리들은 금나라 종실의 처첩이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하긴 했다고 합니다.

 

야사에서는 궁핍하고 학대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나름 평온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강의 변

 

그러나 나머지 황족들의 삶은 정말 지옥 그 자체 였다고 합니다.

 

휘종의 딸,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데, 우선 포로로 금나라에 끌려갈 때 3천명 중 2천명이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휘종이 금나라에서 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휘종의 공주들(딸)이 21명이 있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운이 좋으면 금나라 황실의 첩이 되었고, 그렇지 못하면 내기 상품으로 팔리기도 하고 금나라에서 운용하던 위안소인 세의원(기방)에서 관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살해되기까지 했고, 황녀들이 이러했으니 다른 후궁이나 궁녀들의 운명은 뭐 불을보듯 뻔했지요. 

 

이렇게 휘종은 자신의 딸들이 금나라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매우 태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은 서화가 금나라 병사들에게 훼손되고 약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하는데, 아주 가관이었지요.

 

흠종의 부인 27세 인회황후는 금나라 황궁으로 끌려와 금태종에게 수청을 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치욕의 내용은 아래 동영상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정강의 변

 


4. 남송의 건국

금나라는 위성국가 장창방의 초나라를 앞세워 송나라 세력을 흡수하고자 했으나 백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이복동생인 강왕 조구는 지방에 있어 포로로 잡히지 않았는데, 선대 철종의 소자성헌황후 맹씨가 조구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서한을 보냅니다.

 

이 서한을 받은 강왕 조구는 제위를 선양받아 남송을 건국하고 초대 고종 황제에 즉위합니다. 

 

남송

 

고종은 금나라에 합류하지 않은 기존 송 세력들을 모으면서 금나라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남 지방에서 송을 이어나가지요. 

 

남송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에 금나라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남송을 공격합니다. 

 

 

남송이 반격하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하고 양주, 남경, 임안, 월주, 명주등이 함락당하고, 고종은 온주에서 해상으로 내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화중,화남까지 밀려난 남송이었지만, 새로운 기후,지리, 하천이 많은 지역은 금나라에게 큰 도전이었지요.

 

여기에 더불어 악비, 한세충등의 활약으로 반격에 나선 남송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과 함께 금나라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악비

 

금나라는 관중(장안지역), 사천성(촉)을 점령했지만 더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장강을 두고 서로 일진일퇴를 반복하게 됩니다. 

 

더이상의 희생은 의미없다고 판단한 금나라는 개봉 및 황하 이남을 포기하고 아예 화북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악비등의 주전파가 억울하게 누명으로 처형당하고, 남송은 결국 금나라와 강화를 체결하게 됩니다. 

 

이로써 회하부터 대산관까지를 경계로 삼아 화북지역은 금나라 직할, 남쪽은 송나라가 다스리는 남북조시대를 열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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