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중국 중원의 입구, 만리장성의 동쪽 관문 천하제일 산해관의 위치와 중요성

cky0214 2024. 4. 1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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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중원의 경계를 결정지었던 것은 만리장성이었습니다.

 

만리장성 외부의 민족은 오랑캐라 여기며 경계의 대상이었지요.

 

산해관

 

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최초의 관문이 바로 산해관입니다.

 

수나라 시절에는 임유관이라 불리운 이 산해관에 대해 알아봅니다.

 

요동에 대한 post도 재미있게 봐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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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1. 산해관의 위치와 형태

산해관(山海關, Shanhai Pass)은 중국 만리장성 관문 중의 하나로 여러 관문 중 가장 동쪽이자 동쪽 시작점에 위치합니다(서쪽은 감숙성 가욕관).

 

산해관 위치

 

산해관 위치

 

현재의 허배이성 친황다오시의 동쪽 산하이관 구(山海关区)에 위치하고 있지요.

 

수도 베이징으로부터 동쪽으로 300km에 위치하고 있고, 베이징, 하얼빈을 잇는 징하고속공로와 연결되어 있으며 발해만 북쪽의 옌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산해관은 요서,요동,만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반대 입장에서는 중원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해관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한국에서는 다른 관문과 달리 상당히 유명하고 많이들 알고 계십니다(거용관,가욕관은 거의 모름).

 

삼국지에 등장하는 호로관, 함곡관과 함께 중국에서도 상당한 인지도가 있는 곳이지요.

 

 

중국집 이름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이 산해관은 주변의 둘레가 4km에 이르는 사각형 형태의 요새입니다.

 

산해관 형태

 

높이는 14m, 두께가 7m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지요. 동쪽과 남쪽 북쪽은 깊고 넓은 해자가 파져있고, 도개교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는 종탑이 서 있으며, 4면 모두 문이 존재하지만 현재는 동쪽의 진동만만 남아있습니다. 이 문에 걸린 현판의 천하제일관은 산해관을 대변하는 이름이지요.

 

산해관 형태

 

산해관 본성 맨 동쪽 4km 에 있는 발해만과 접하는 부분은 노룡두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고 만리장성의 끝이자 시작접입니다. 

 

노룡두

 

이 노룡두는 북제(수나라 전신)시절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2. 산해관의 역사

산해관은 예전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습니다.

 

수, 당나라 시절에는 임유관(臨渝關)으로 요,금 시절에는 천민현, 천민진으로 불렸습니다.

 

 

수 문제 시절, 강감찬의 선조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을 선제 공격한 적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 임유관입니다.

 

위치도 약간 달랐는데요, 수나라 임유관의 경우 현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했습니다.

 

이러나 11세기 초 요나라 시절에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이지요. 

 

산해관

 

현재와 같이 산해관이란 이름이 붙혀진 것은 1381년 명나라 명장 서달 장군이 관문을 수리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다 하여 산해관이라 명명한 이후입니다.

 

이후 명나라는 이곳을 관리하는 산해위를 두었으며, 척계광이 요새화를 시작했고, 산해관 동쪽,남쪽,북쪽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면서 군사도시화 했습니다. 

 

이로써 산해관은 견고한 요새가 되었으며, 청나라가 이곳을 얻기 위해 상당한 피를 흘릴 정도로 위세가 좋았지요. 

 

산해관

 

명나라 말, 만주족의 후금이 건국된 후 명나라 정벌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이 산해관이었습니다.

 

한쪽 면은 발해만이라 제대로 된 해군이 없었던 후금으로써는 이 산해관을 넘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북쪽은 흥안령 산맥이 있어 대군이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산맥을 넘어도 거용관 등이 있어 오직 산해관을 뚫어야 했습니다.

 

거용관 산해관

 

이곳을 우회하여 몽골고원을 통과하고 오르도스 초원쪽으로 내려오는 방법도 있지만 이러면 보급로가 너무 길어져 수도인 베이징 공략은 힘들어집니다(홍타이지가 한 번 시도하여 약탈하고 돌아감).

 

역시나 최단 거리는 산해관을 지나가는 방법뿐이어서 후금 창시자 누르하치는 죽어라고 이 산해관 부근을 공략했지만 홍이포를 앞세운 원숭환에게 참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함락하지 못하고 누르하치는 사망하지요. 

 

 

홍타이지에 이르러서야 명나라 원숭환이 억울하게 처형당하고 나서야 산해관을 접수합니다. 

 

공격으로 접수한 것도 아니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망하고 산해관 장령에 있던 오삼계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산해관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산해관

 

이후 청나라가 명을 멸한 이후에도 이 산해관의 중요성은 떨어지지 않아서, 선양과 베이징 사이에 위치한 이 산해관은 교통의 요충지가 됩니다.

 

청 대의 공식 이름은 임유현이었지만, 이후로도 계속 산해관으로 불렀습니다. 

 

아편전쟁 때도 산해관에서 전투가 있어났으며, 중일 전쟁 시기 관동군도 산해관을 공격합니다(1933년 1월 30일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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